"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 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봐. 용감해질 수 있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 나오는 대사다. 상상은 그렇다.
'상상(想像)하다.' 그 사전적 의미는 '미루어 생각함'을 뜻한다. 이미 아는 사실이나 관념을 재료로 하여 새로운 사실과 관념을 만드는 작용이다
2500년 전 한비자에 '견골상상(見骨想象)'이라는 말이 나온다. '볼 견', '뼈 골', '생각할 상', '코끼리 상'으로 이뤄진 말이다. 코끼리의 뼈를 보고 코끼리를 그려본다는 의미다. 4000년 전에는 북경을 포함해 중국 전역에 코끼리가 살고 있었다. 다만 코끼리의 서식지가 인간에 의해 경작지로 바뀌면서 코끼리는 점차 사라져간다. 이렇게 사라진 코끼리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는 거의 보기 힘들 었다. 이에 사람들이 죽은 코끼리의 뼈를 모아서 살아 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이것을 '상(象)'이라고 한다. 이것이 '상상(想像)하다.'의 어원이다. 가지고 있는 재료를 통해 새로운 사실과 관념을 만들어내는 일.
불교 경전 '열반경(涅槃經)'에는 '맹인모상(盲人摸象)이라는 말이 있다. 맹인모상(盲人摸象)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만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 나오는 여섯명의 장님이 등장한다. 이 여섯은 각자 코끼리를 만져보고 자기가 생각하는 코끼리에 대해 말했다. 어떤 이는 상아를 만졌고,어떤 이는 귀를 만졌고, 어떤 이는 다리를 만졌다. 이들은 각자 다른 주장을 한다.
다리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코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절구통 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상아를 만진 이는 코끼리가 '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거짓말을 한 이는 없다. 틀림없는 객관적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 진실도 각각 달라질 수 있다.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도 이렇다. 같은 것을 만지고도 완전히 다른 것이라 믿고 산다. 모든 것은 관념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관념으로 만들어낸 것에 '코끼리 상(象)'을 썼다. 코끼리 상(象)은 '코끼리'라는 뜻 뿐만 아니라, '형상, 모양, 흉내내다'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게 됐다. 이 발음은 불교에서 '상(相)을 짓다'라는 표현과 발음이 같다. 상을 짓는다는 말은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처럼 미루어 상상하는 일이다. 고로 장님은 코끼리를 보고 각각 '기둥 모양', '절구통 모양', '무 모양'이라는 상을 지었지만 이것은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다.
한자에 4가지 '상'을 사람들은 비슷하게 쓴다. 코끼리 상(象), 생각 상(想), 모양 상(像), 서로 상(相). 때로 이를 구분짓지 않고 쓴다. 모두 코끼리에서 의미가 출발한다. 모든 것은 관념일 뿐이며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은 없다. 장님으로 우리가 더듬고 있는 것은 코끼리의 극일부에 불과하다.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코끼리를 더 섬세하게 더듬어 볼 것이 아니라, 감고 있는 눈을 떠야 한다. 감은 눈을 뜨는 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상'을 지우는 일이다. 싯다르타는 '번뇌가 생기는 원인'을 '상'을 짓기 때문이라 했다. 없는 것에 이름을 짓고 '있다'고 하니, 진실로 사람들은 그것이 있다고 믿는다. 바닷물과 강물 사이의 어느 물을 뜨면 그 물은 바닷물일까. 강물일까. 알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이름 짓기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나'라는 것이 그렇다.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나'는 존재 하지 않는다. '나'라는 것은 '관념'일 뿐이다. 생각해보자. '나'는 어디까지 일까. 머리카락까지가 '나'인가. '손톱'까지가 '나'인가. 외부에 있던 음식이 위장에 들어오면 그것은 '나'인가. 그것이 소화되어 온 몸으로 퍼진다면, 이제 그것은 '나'인가. 그 중 일부가 소변이나 대변으로 배출되면 그것은 '나'인가. 알 수 없다. 나는 '나'를 통해 들어오고 나가며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 적 없다. 인간의 신체는 65.4%의 물로 이뤄져 있다. '물'은 '나'인가. 인간은 산소 25%, 탄소 9%, 수소 6.3%, 그밖에 질소, 칼슘, 인, 칼륨 등의 원자로 이뤄져 있다. 그 원자들은 나인가. 때로 그것은 비누나 연필의 그것과 닮았다. 그것은 '나'인가. 다만 인간은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것을 '아상(我相)'이라고 부른다.
'아상(我相)', 즉 '나'라는 것은 관념일 뿐이다.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남'도 없다. '남'이라는 것은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닷물과 강물 같은 존재다. 관념일 뿐이다. 남과 자신은 구분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여기서 '남'은 꼭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 '다람쥐' 심지어 '고철'도 포함된다. 그것은 '나'와 다르지 않다. '나'와 다르지 않고 구분할 수도 없다. 그것이 인상(人相)이다.
머리카락, 입고 있는 '옷', '나무'나 '다람쥐'도 모두 '나'로 확장하다보면 결국은 우주의 모든 것은 '나'라는 덩어리 일부다. 역시 구분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다보니 너무 많은 오류를 만든다. '상'을 짓는 일이다. '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 짓기'다. '나'라고 이름짓고, '남'이라고 이름짓고, '다람쥐'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다. 그것은 '관념'에서만 존재할 뿐이다.'존재'라는 것은 언어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지성 크기로 난도질 된 존재들은 이처럼 본질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은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비는 강이되고 강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가 된다. 물은 이처럼 순환한다. 순환 중 물은 '인간'의 몸속에 아주 잠시 머물다 빠져나간다. 이처럼 모든 것들은 역시 모두 변화무쌍하다. 그것은 신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나'라고 하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다. 끊임없이 변한다.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도 그렇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만물은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한다. 고로 불완전하다. 불완전하다. 이것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한다. 불완전과 변화무쌍은 만물에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나무와 다르지 않고, 돌덩이나 공기도 나와 다르지 않다. 물도 나와 다르지 않고 구름도 나와 다르지 않다. 고로 '나'라는 것의 '생명' 혹은 '수명', '삶' 같은 것도 그저 관념일 뿐이다. 그것에 사로 잡혀 있으면 인간은 사소한 일에 집착하게 된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죽음은 공포를 만든다. 죽음은 '삶'을 인지 했을 때만 생긴다. '삶'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공포에서 자유로워진다. 질병, 이별, 공포와 스트레스는 '삶'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줄어든다. '삶'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불교 철학에서는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한다.
싯다르타는 여기서 말한 네가지 상이 인간의 번뇌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상'이라는 관념은 허상일 뿐이며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하고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모든 것에 자유로워진다. 그 경지를 해탈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