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nk의 어원은 Think와 공유한다. 잊지 않고 생각하겠다는 의미가 감사로 변한 것이다. 감사한 것은 결국 기억하는 것이다. 저장된 기억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능동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면 감사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하면 감사하지 않다는 것은 잊고 있다는 의미다.
유학하던 시기, 밤 10시에 출근했다. 반쯤 지하로 내려가는 '바' 였다. 사장은 청바지와 검은 셔츠를 입고 오라고 했다. 출근하면 빨간색 마른 천을 준다. 마른 천은 바지 뒷주머니에 꼽는다. 수요일, 목요일은 조용한 음악이 나오는 '바'였다가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 되면 클럽으로 바뀐다. 클럽을 한번도 가 본 적 없지만 클럽에서 일했다. 클럽이 되면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나온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바로 옆 사람과 겨우 대화가 가능하다. 사방에 붙어 있는 스피커의 베이스는 귀가 아니라 몸으로 들어온다. 음악은 물리적으로 사방으로 때려 몸을 관통해 나간다. 일은 대략 아침 10시면 끝났다. 12시간을 일하면 쉬는 시간은 없다. 식사 시간도 없다. 땀과 기름, 알코올이 범벅된 얼굴로 퇴근한다. 아침 햇살이 환하고 조용하지만 활기찬 기운이 밖으로 느껴지면 '아파트 청소'를 갔다. 아파트는 '클럽'에서 15분에서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는 계단 손잡이를 누런 걸레로 닦는다. 아침 11시 반쯤 됐는데 Andy라는 미국인 바텐더가 아파트에서 나왔다.
그는 여기서 뭐하냐고 물었다. 청소중이라고 했다. 편안한 잠옷 바지를 입고 서 있는 그는 황당해 했다. 함께 퇴근했던 동료를 자고 일어나서 만났으니 당연했을 것이다. Andy는 나에게 미쳤다고 했다. 잠은 자지 않느냐고 물었다. 빨리 일 마무리 하고 들어가라고 했다.
일을 마무리하면 '학교'를 가야 했다. 학교를 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들어갔다. 한 번은 출근을 찍기 위해 지문 인식기에 손가락을 올렸다. 과정없이 지문이 없어 인식이 되지 않았다. 손에는 수포가 올라왔다. 살균 세척기에서 막 꺼낸 컵들을 맨손으로 잡으니 손은 화상이 입어 항상 간지럽고 수포가 가득 있었다. 지문은 없었다. 그것을 Teron이라는 호주 청년이 보고 기겁했다.
"돈은 몸보다 중요한게 아니야."
대략 2시쯤되면 일을 마쳤다. 집으로 가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기름때를 씻어낸다. 기름때가 씻어지면 옷만 갈아입고 학교로 갔다. 수업을 듣는다. 3시에서 6시까지 수업을 듣고 나면 다시 30분을 걸어서 '여자 중고등학교'로 간다. 그 지역에서 꽤 명문으로 소문난 학교 였는데 그곳에 도착하면 묵직한 청소기를 들쳐메고 달리다시피 학교 교실 바닥을 청소했다. 이때 프랜즈를 mp3파일로 변환하여 듣곤 했다. 그것이 굉장한 낙이었다. 때로는 팟캐스트를 듣기도 하고 꽤 한국 라디오 중 재밌는 시리즈를 듣곤 했다. 당연히 당시 스마트폰은 없던 시기다. 인터넷이 비싼 나라다보니 20분짜리 영상을 하나 받으면 몇 개월 동안 똑같은 부분을 반복 재생하고 들었다. 당시 들었던 라디오 중에는 '정선희의 정오의 희망곡'에 출연한 '강호동, 유재석' 게스트 편이 있었다. 어찌나 한편을 많이 들었는지, 지금도 그 내용을 줄줄 외울 정도다. 학교 청소가 끝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면 대략 9시 정도가 되는데 1시간 침대 옆에 쪼그려 자고 클럽으로 출근했다. 멀쩡한 침대를 두고 옆에 쪼그려 앉아서 자고 있는 나를 보고 함께 살던 형이 물었다.
"야, 침대에 누워서 자."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자면 제시간에 출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쪼그려 자고 다시 출근한다. 언제는 함께 사는 형이 물었다.
"너는 렌트비는 내면서 왜 집에는 안 들어와? 잠은 안자?"
꽤 유쾌한 형님이셨는데 나에게 '잡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직업이 많아서 '잡스'란다.
"너는 이 나라에 일하러 온거야, 공부하러 온거야?"
기꺼이 그 말을 들을 때까지 일을 했다. 일정이 꼬이면 그나마 잘 수 있는 한시간도 사라지는 날이 있었다.
사람이 한 시간만 자고 어떻게 살까. 물론 일주일 내내 그랬던 것은 아니다. 클럽은 '바' 일때는 늦게 출근하고 일찍 끝났다. 아파트 청소는 일주일에 세번을 출근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가끔 최악으로 겹치는 상황이 생기는데, 그러면 당연히 잠을 자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대략 1~2년 정도 유지했던 것 같다. 이렇게 살다보면 월요일 정도에 비번이 생긴다. 비번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다. 어느 땐가 Sky라고 하는 말레이시아 DJ가 말했다.
"우리집 정원 정돈하는 일 도와주면 100불을 줄께. 혼자는 못할테니 친구를 함께 데리고 와."
정원정돈, 전단지 뿌리기, 팻말 들고 서 있기, 매장 청소, 학교 청소, 클럽 청소, 일식직 아르바이트 유학하는 동안 해보지 않은 아르바이트가 없다. 그렇게 살아도 항상 돈이 부족한 편이었다. 공용 세탁기와 건조기는 돈을 넣어야 사용가능 했다. 세탁은 샤워하면서 발 밑에 세탁물을 놓고 씻었고 건조는 '라디에이터' 위에 말렸다. 언제나 꼬릿 꼬릿한 냄새가 났겠지만 그냥 다녔다. 한번은 '경제'강의를 듣는데, 중년의 인도 여성 교수님이 말했다. 내 앞머리가 너무 길어보인다고 했다. 오른 손으로 앞머리를 지긋하게 눌러보니 머리가 입술끝까지 닿았다. 집으로 돌아갔다. 가위를 찾아보는데 가위가 없었다. 그때 옆에 손톱깎이가 보였다. 머리카락을 대충 잡고 빙글 빙글 돌려서 두껍게 만들었다. 손톱깎이로 '딸깍'하고 잘랐다. 머리칼이 잘려 나갔다. 한 1시간을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자르니 제법 그럴싸 했다. 물론 제3의 눈에는 어쩐지 모르겠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다. 얼마 뒤, 손톱이 길어서 손톱깎이로 손톱을 짤랐다. '딸깍' 소리가 나며 엄지손톱이 '빠찍'하고 갈라졌다. 그때는 몰랐다. 머릿카락이 그렇게 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머릿카락을 잘랐던 손톱깍이는 머릿카락 모양만큼 깊게 홈이 패였으며 고로 손톱깍이는 손톱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깨부수 었다.
한 번은 양치질을 하려는데 치약이 없었다. 옆방에 있는 일본인에게 다가갔다. 문을 열었다. 평소 먹을 것이 생기면 나눠 주고 인사도 종종하던 편이라 치약 정도는 빌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옆방을 두드리고 물었다.
"혹시 치약 좀 빌릴 수 있을까?"
일본인은 '안돼. 미안해'하고 문을 닫았다. 너무 생각치도 못한 일이다. 그때 양치질을 안했던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당시 빨래, 머리, 세수, 샤워. 모든 것을 비누 하나로 해결했다. 90센트하는 바게트 빵과 다먹은 간장통만 남은 날에 바게트빵에 간장을 발라 먹었던 기억. 크리스마스날에는 '분홍소시지'를 사다가 오븐에 구워 먹었던 기억. 맨밥에 라면 스프만 뿌려 먹었던 기억. 그냥 밥만 먹어봤던 기억. 아참! 분홍소시지는 꽤 좋아하던 간식이었는데, 그것을 오븐에 구워 먹으면 무슨 맛이 나는 사람이 있으려나. 분홍 소시지를 오븐에 구으면 '지우개'가 된다. 아무 맛도 나지 않고 가루로 부숴진다. 그밖에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나니, 눈에 보여지는 게 있다. 일단 가장 감사한 것은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뜰 때 일어나는 즐거움. 세끼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즐거움. 배고픔이 사라진다는 체지방 연소제와 녹차를 삼키고 토마토 하나를 슥슥 옷에 문질러 닦아 먹었던 시기. 식사의 즐거움. 그런 것들이 보인다. 어느 때가 되면 다시 모든 걸 잊어 버릴 때가 있다. 다시 그때를 떠올려보니 그렇다. 잊고 있어서 감사한 줄 모르는 것이지,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 투성이다. 때로 그런 기억은 누군가에게 좋은 충고나 조언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