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수요 공급'이 아니라 '분업'으로 시작한다. 국부론이 강조하는 '분업'을 '헨리포드'는 알고 있었다. 전문가 여럿이 달라 붙어 하나의 자동차를 조립하는데 걸리는 12시간. 헨리포드는 그것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일의 분업화. 단순업무를 분업하는 일만으로 작업시간은 1시간 33분으로 단축된다. 분업화는 단순히 업무 시간을 줄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포드는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할 수 있었고 직원들의 업무 시간을 크게 줄였다. 심지어 임금을 두 배나 올리기도 했다. 자동차를 많이 만들 수 있게 되자, 철강 산업이 활황이 됐다. 철강 산업이 활황이 되자 용광로를 운영해야 했다. 용광로를 운영하기 위해서 목재를 생산해야 했다. 목재를 운송하기 위해 인프라 시스템을 도입해야 했다. 내연기관 자동차가 폭발적으로 늘자 석유산업이 활황이 된다. 석유에서 나온 성분은 천연 고무를 대체 했다. 석탄, 석유, 철도, 무역, 주유소, 제재소, 유리 공장.
1903년 포드는 '포드 모터 컴퍼니'를 설립한다. 그리고 1908년 대량 생산된 자동차 T모델을 1908년에 대중화한다. 분업이 이처럼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1914년 6월 28일 더 극대화된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다. 1890년까지 대영제국의 경제력에 미치지 못한 미국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량 생산을 시작한다.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하는 간단한 '분업'은 1차 세계 대전에서 막대한 물량을 쏟아 넣을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자동차 산업이 커지면서, 분업화 되면서 인류 역사상 유래없는 물량을 생산해 쏟아 낼 수 있었다. 심지어 포드의 모델T는 1차대전 중 2만대 가까이 유럽 전쟁으로 수출됐다. '테일러즘', '포디즘'이라고 불려지는 '분업'의 위대함이다.
주먹도끼는 인류가 만든 최초의 규격화된 도구다. 이 도구는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다용도다. 대체로 짐승을 사냥하거나 가죽을 벗기기도 하고 나무와 풀을 베거나, 땅을 파고 고기를 썰기도 했다. 이런 만능 도구는 아이니하게도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세분화된다. 땅을 파기 위해 삽을 개발하고 고기를 썰기 위해 칼을 만들었며 풀을 베기 위해 낫을 만들었다. 문명이 발달 할수록 도구가 세분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어쩐 일인지 점차 분화되던 일이 다시 흡수되어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그것으로 말을하고 일도 하며 놀기도 한다. 잘때, 먹을 때, 씻을 때, 심지어 쌀 때도 언제나 함께 한다. 현대판 '주먹도끼'는 그렇게 인류를 구석기로 돌렸다. 하나로 붙어 있으면 그것이 '효율'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 논리로 '주먹도끼'도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도구는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 본질이지, 도구 하나로 여러 일을 처리하는게 효율이 아니다. 스마트폰이 '주먹도끼'가 되자, 사용자는 분업을 잊는다. 결국 도구가 '멀티태스킹'하듯, 인간도 '멀티태스킹' 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전자책을 읽는다거나, 짧은 SNS를 확인하며 영상을 본다.
기다란 나무 막대기에 '지팡이', '지휘봉', '몽둥이'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름을 붙이면 목적이 생긴다. 비로소 그것이 된다. 거기에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인간은 도구에 무기력을 느낀다.
왜놈들이 조선땅에 들어와 박았다는 쇠말뚝은 알고보니, 정기를 끊기 위한 쇠말뚝이 아니라 근대적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세운 '대삼각 본점'이었다. 그것의 이름을 모르고 용도를 모르면 인간은 그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단순히 '나무막대기' 일 때 느끼던 불안의 감정은 거기에 이름을 붙이면서 정체성을 갖는다. 애초 인간의 공포는 '무지'에서 온다. 그것을 그것이라 정의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편안해진다.
그것은 그것이다. 그렇게 정의하고 있을까.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이다. 그 정의는 틀렸다. 스마트폰은 '소통 도구'이자, 'TV'이고 'MP3플레이어'이자, '카메라'이며, '캠코더'이자 일기장이고, 책이고 메모장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냥 주먹도끼다. 이것의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청동기 시대 인간에게 '돌낫'이라는 도구는 없어도 대체재가 있다. 없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비슷한 용도이 다른 대체제를 찾거나 만들지 모른다. 구석기 시대 인간에게 '주먹도끼'라는 도구가 사라진다면 어떨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만능 도구가 사라지면 구석기 시대 인간은 모든 것을 잃는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도구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대체하고 있을 때, 결국 '주종관계'는 바뀐다. 인간보다 능력있는 도구는 결국 인간을 위기에 빠지게 한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몇가지 대체제는 있을까. 그것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을까. 그 의존도는 높지 않은가. 분화되고 분업화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스마트폰의 문제뿐만 아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다보니 점차 모호성이 강해진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급한 것과 덜 급한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람의 인식이 '분업'과 '분화'와 떨어져 모호한 경계선에 걸쳐 있다면 다양한 문제가 생긴다. 사람에게는 어찌할 수 있는 일과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이 모두는 걱정 거리에 속한다. 그러나 전자는 행위를 통해 변화할 수 있고 후자는 변화할 수 없다. 그냥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그냥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 분명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신'과 '나'의 역할 분담이다. '신'은 신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할 뿐이다. 운동을 해도 살이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열심히 노력해도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수 있고 없고는 신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다. 신과 나의 역할 분담은 분명이 하는 것은 20세기 포드가 생산량을 늘려 다양한 파생효과를 만든 것과 같다. 바퀴를 끼우는 이가 엔진 조립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엔진 조립을 하는 이가 바퀴 끼우는 일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완전하게 된다. 신이 누군가. 신은 신이다. 신은 언제나 완전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한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