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 us not into temptation"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여기서 예수가 말한 '시험'은 '테스트'가 아니다. '유혹'과 '방해'를 말한다. 그것은 '방해자'라는 의미를 가진 '사탄'과 닮았다. 로마 카톨릭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태복음 6장 13절의 주기도문 일부를 변경했다. '유혹에 빠져 들지 않게 이끌어 주세요'를 '유혹에 빠지게 이끌지 마세요'로 바꾼 것이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영문은 이렇다
"Do not let us fall into tempatation"
개인적으로 변경 전의 의미가 '주기도문'의 취지와 어울린다고 본다. 예수는 신에게 "유혹으로 이끌지 마세요."가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세요." 라고 했을 거라 본다.
핵심는 고난과 시련, 유혹과 방해를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났음에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기도문이 '주술문'이 되어가는 것을 예수가 고쳐 읊은 것이다.
고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말은 '고난과 시련'을 모두 치워 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 오더라도 휩쓸리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의미다.
쉬운 건 재미없다.
인간은 진화론적으로 '쾌락'을 선택했다. 유전자 전파에 도움이 되는 행위는 대체적으로 '쾌락'을 근본으로 한다. '먹는 것', '번식하는 것', '이기는 것'. 대체적으로 그것들은 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먹는 것에 대한 욕구가 없거나, 번식하는 것에 무욕하거나, 이기지 못하는 이들은 자연선택에서 도태됐다. 유전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이들은 자연선택을 받아 자손을 이었다. 무욕을 추구하는 '스님'이나 '성직자'는 분명 '쾌락'에서 벗어나 번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나 그들은 '자손 번식'에 실패한다.
고로 인간은 쾌락을 선택하도록 진화한다. 쾌락은 도파민과 세로토닌, 엔돌핀을 포함한 다양한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한다. 이런 신경전달물질은 대체로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 먹기 위해, 번식하기 위해, 이기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추구한다. 고로 '시시한 것'이 재미없는 이유는 진화론적이다. 당연하다. 인간은 '쾌락'을 위해 '목적'을 설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한다. 그 감정을 고상한 말로 '성취감'이라고 한다. 인간은 설정한 목표를 달성했을 때,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한다. 성취감은 중독성을 갖는다.쾌락이다. 흥미롭다. 고로 '보상'을 얻기 위해, 각자 다른 '목표'를 설정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한다. 어쨌건 인간은 심심한 것을 싫어한다. 심심한 것은 쾌락과 반대 개념이다. '다람쥐 쳇바퀴'를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다람쥐는 쳇바퀴 안에서 엄청나게 달린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다. 나아가지 않는 그것을 끊임없이 돌린다. 대체 이 녀석은 진화론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걸까. 역시 이것도 진화론적이다. 다람쥐와 같이 '쥐과'에 속한 설치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생태계에서 먹이사슬 하단에 위치한다. 이들은 적잖은 포식자들의 단백질 공급원이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 이 생존 방식이 옳은 이유는 이들이 현재 포유류의 40%나 해당 하기 때문이다. 이들인 번식을 많이 하고 끊임없이 달리며 무리를 이뤄 생활한다. 쾌락에 적응한 동물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쾌락'은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만 '생존'에 필수전략이다. 설치류가 의미없이 달리고 많이 번식하고 무리지어 생활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한심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쾌락이 진화론적으로 생존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도 비슷하다. 인간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심심하면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심지어 제자리를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 다람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다람쥐가 생존에 유리했듯, 심심함을 견디지 못한 인물은 분명 생존에 유리하다. 심심한 것은 재미가 없다. 너무 수월하면 흥미가 떨어진다. 적당히 고통도 있고 어려움도 있어야 할 맛난다. 스도쿠 문제를 풀거나 끝말잇기를 하거나, 온라인 상으로만 존재하는 제3의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는 등 인간도 도파민, 세라토닌을 얻기 위해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는 잘 튕겨지는 공을 둥근링 안에 집어 넣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누군가는 성대를 떨어 음역을 조절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일들은 '생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는 결과적으로 '생존'에 영향을 끼치게 됐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됐다. 결국 생존을 위해서는 '생존'을 위한 원시적인 방식을 택하는 것이 아닌, 고차원적인 방식을 택해야 한다. 성취감을 가져야 한다. 시시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닌, 꽤 고차원적인 문제를 다르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비록 나를 구성하는 유전자들에게 골머리를 제공할지라도, 분명 다음에게 유전자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이유이며 그 유전자를 전달 받은 객체가 다음 객체엑 유전자를 잘 전달 할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목이 따끔거리고 눈이 떠지지 않았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고 목뼈에서 '포크'가 자라나 두개골 속의 뇌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엄청난 고열에 덜덜 떨었다. 기어가다 시피 병원을 갔더니 의사는 말했다.
"밤에 39도까지는 체온이 오르셨겠는데요."
A형 독감이란다. 병원에서 이것 저것을 섞어주신 수액을 맞고 한 시간을 누워 있었다. 아이들은 '모기에 물리면 주사를 맞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기들도 모기에 물렸다고 서로 걱정하고 난리다.
누워 있는 상태로 오후 일과를 준비했다. 물론 온당하게 제 일을 처리한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이것저것 밀려 있긴 하다. 의사의 권고는 쉬어야 한다고 했다. 노랗고 하얀 액체가 혈관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자. 추웠던 공기가 점차 데워진다. 그렇다. 오늘은 꽤 더운 날이었다. 체온이 내려갔다.
쉴수도 있지만 이럴 때 쉬면 안된다. 원래 당연히 포기해야하는 상식적인 순간에 포기하지 않아야 나아간다. 그것이 재밌다.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해야 재밌다. 20대에 내 모습은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풍족한 유학생보다는 '가난한 유학생'이 가질 수 있는 낭만을 갖고 싶었다. 실제로 나는 가난한 유학 시절을 보냈고 개인적으로 그 시절, 찢어진 신발과 청바지의 내 모습에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낀다. 그렇다. 이렇게 뚫거 나아가야, 기억할거리가 되고 자랑할 거리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부심이 되고, 여든이 넘어 몸 성하지 않아 누워서 TV에 눈을 붙이고 껌뻑이는 그 순간에도 떠올릴 추억이 있고 누군가의 조언에 해줄 말이 생긴다. 내 젊음은 통장잔고를 쌓아 올리는 것 만큼 추억을 쌓아 올려야 할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