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대인들은 사구로 둘러 쌓인 사막 한 가운데서 위치를 확인하고자 했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똑 같은 모양의 사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광경은 그들의 일부를 말라 죽도록 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대체적으로 말라 죽는다. 황량하고 넓은 사막은 방위를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만큼이나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도록 한다.
시련은 '사막'에서 달련됐지만 '바다'에서 사용됐다. 유대인들이 사막을 횡단하기 위해 사용했던 태양과 별관측법을 익혔다. 하늘을 살피고 별의 위치를 살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목적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중국에서 자석의 특성을 이용하여 방위를 알려주는 도구가 발견됐다. 그것을 유대인들은 '사막'에서 사용했다. 대체로 11세기 초 송나라 시기에 중국인들은 이것으로 방위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13세기 그것은 '사막'의 아랍인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사막에 사는 이들이 사용하던 그 물건이 15세기 유럽인들에게 넘어가면서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바다와 사막은 같은 원리로 사람을 고립시켰지만 같은 원리로 모든 것을 연결시켰다.
기본적으로 연강수량이 250mm 미만인 지역은 사막이다. 반대로 바다는 물로 넘쳐 난다. 엄청나게 극과 극인 바다와 사막이다. 역시나 이 둘을 더욱 비교되게 하는 것은 '생명력'이다. 사막은 누가 뭐래도 '죽음'을 닮았고 바다는 누가 뭐래도 '생명'을 품었다. 이 둘은 이런 차이가 있어도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막을 구분 짓는 기준은 '강수량'이다. 그런 이유로 일부 바다는 '사막'이기도 하다. 중국 남부에 위치한 '사해'나 퍼시아 만, 지중해, 호주 대부분의 해안은 건조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이 바다는 엄청나게 많은 물을 담고 출렁거리지만 결국은 '사막'이다. 대체적으로 이런 역설 덕분에 사람들은 바다를 선망의 대상으로 두거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둔다.
제주에서 자라고 뉴질랜드에서 공부를 했다. 첫 해외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살아온 배경이 '섬'이다. 어디든 쉽게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단순히 감성적인 상태가 되기 때문은 아니다. 모든 바다는 출렁거린다. 그것은 '바람'의 영향이기도 하고 '달'의 영향이기도 하다. 살랑 살랑 거리는 바람은 몸에 묻은 무언가를 씻어 낸다. 촉각이 바람 샤워를 하면 '달'이 나선다. '달'은 지구를 빙글 빙글 돌며 공전한다. 달과 지구는 서로 끌어당기며 상호작용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력은 물을 출렁거린다. 물이 출렁거리는 모습. 거기에 '태양' 바다를 쏜다. 주로 백색을 띈 태양은 사실 다양한 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다는 태양빛을 받아 산란시킨다. 이때 바다는 파란색 파장빛을 더 많이 산란한다. 태양이 바다를 '파란색'으로 만든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파란색을 보면 안정감을 갖는다. 파란색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시력이 위안을 받고 나면 조력의 차이로 발생하는 파도소리가 귀로 들어온다. 들어오고 나간다. 다시 들어오고 나간다. 해변가의 파도소리는 인간의 호흡과 유사한 규칙과 리듬을 갖고 있다. 이 패턴 형성은 동조현상을 만든다. 파도가 연속적으로 소리를 자극한다.
들어오고 나가는 리듬과 반복은 들숨과 날숨을 닮아 마음을 안정화 한다. 이는 심장박동과도 같은 리듬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파도가 부서질 때 공기중의 물방울은 전기적으로 음이온을 갖는다. 대기중의 음이온은 공기를 떠다니가 다양한 입자와 반응하여 미세한 입자를 제거한다. 코로 크게 한숨 들이키면 이내 진정되는 이유는 바다에 서서 깊은 호흡을 할 때, 음이온이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세로토닌이 분비되면 우울감이 감소하고 스트레스가 완화된다.
대체적으로 사람은 호흡이 틀어지며 긴장과 불안에 휩쌓인다. 촉각, 시각, 청각, 후각. 태양, 달, 바다, 바람 그런 것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작동하는데 치유가 되지 않을리 없다. 바다의 물결은 가슴을 채우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호흡과 같다. 우피 골드버그는 '신이 얼마나 재능 있는지 잊게 될 때, 바다를 본다'라고 했다. 나에게도 바다는 그런 존재다. 아주 가문 어느 여름 정원에 물을 준 적이 있다. 그렇게 넓은 정원은 아니었지만 그 바닥을 조금 적시는데 한참의 물이 필요했다. 한참동안 땡볕에 서서 골고루 물을 뿌려도 그 땅의 표면을 적시기 무리였다. 가문 날이 며칠 지나고 소나기가 내렸다. 1분 정도, '쏴'하고 내린 소나기는 정원을 흠뻑 적셔버렸다.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것을 느끼게 됐다. 정원을 적신 물이 얼마나 내렸는지 감이 잡히지도 않는데, 바다를 보면 그것이 넘쳐 흐른다. 그것을 보면 자연과 신, 삶에 대한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커다란 욕조에 검은 물감 한방울 떨어 뜨리면 금새 사라져 버린다. 그 위대한 덩어리에 무릎 꿇을 정도로 감탄할 수 있다. 바다가 품고 있는 그 무한대에 가까운 그것. 그것이 꼭 뭐든 품어줄 것 같다. 어떤 더러운 것을 바다에 뿌려도 바다는 그것을 품어 낼 것만 같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어머니와 바다에 놀러 다니곤 했다. 바다에 수영을 하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 거기에 소변을 누어도 전혀 오염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바다는 성인이 되서 가만히 내 걱정과 스트레스, 불안도 품어준다. 아주 지저분한 머릿속 스트레스를 바람이 앗아가 바다에 희석해 버리면 바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호흡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하며 호흡과 박동 소리만 들려준다. 그것은 '사막'을 닮았다. 시련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막은 시련이 아니었다. 투정 부렸지만 지나고 나면 이유 있던 어머니의 말씀같다. 바다는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