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사고 보는 유현준 교수 님 책
잠언 19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누군가의 공간을 찾았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공간에 위치한 책상 속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자리에 동행한 이가 있었다. 공간은 특이했다. 그 공기가 사뭇 달랐다. 빼곡한 시간표와 목표들이 쓰여 있었다. 도통 방향을 알 수 없는 막연한 꿈들. 그것이 너저분했다. 동행한 이가 말했다.
"근면하게 인생을 낭비하는군"
입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다. 근면하게 인생을 낭비한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표류하는 배 위에 마주보는 사공이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것 같았다. 하나는 오른쪽으로 다른 하나도 오른쪽으로 둘다 동시에 노를 당기고 있는...
근면하게 제자리를 돌고 있는 표류하는 배처럼 막연한 꿈과 시간이 공간을 떠돌았다. 그것이 의미라면 의미다. 삶이 꼭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나 근면함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면 삶은 골치 아파진다. 분명 열심히 당겼으나 제자리인 것. 그것은 얼마나 노력했는지와 다르다. 어느 사공 하나만 돌아 앉아도 앞으로 나갈 일이다. 그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더 많은 힘을 들게 만든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수동적 야망가, 능동적 무욕가.
수동적 야망가는 대체로 꿈과 이상은 가득하지만 그것을 실현할 의지가 없는 경우다. 대체적으로 이들의 입에는 이런 말이 따라 붙는다.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욕망과 현실이 부딪치면서 무의식은 의식과 충돌한 무언가를 언어로 내뱉게 한다.
능동적 무욕가는 대체로 명확한 꿈과 이상은 없고 막연한 방향 설정만 있다.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성공하고 싶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처럼 경계가 불분명한 목적을 목표로 설정하고 움직인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 움직인다. 그것은 얼핏 욕망 처럼 보이지만 무욕이다. 진정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이다.
수동적 야망가는 대체로 사회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다. 말만 그럴싸하거더나 꿈만 거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능동적 무욕가의 평은 이와 다르다. 어쨌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사람들은 나쁜 평을 내놓치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행동'을 하지 못하는 반면, 그들은 그것을 해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성실하게.
다만 그 둘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대체로 도파민과 세로토닌이라는 신경물질은 인간에게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분자다. 이것들이 부족하면 '우울증'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과다하면 '조현병'이 된다. 좋은 게 많다고 좋은 건 아니다. '다다익선'과 부딪치는 '과유불급'은 대치점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다익선을 지나 조금 더 나아가면 과유불급의 선을 만난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에 성정되기도 했던 인류학자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 말라'라고 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가 언제나 정답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대체로 우리가 설정하는 꿈 같은 것은 막연하여 없느니 못하다. 인간은 목표를 설정하면 최선을 다해 전력으로 움직인다. 최선을 다한 표류끝에는 '목적지'가 아니라 '번아웃'이 기다리고 있다. 번아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제자리를 달리는 것은 차라리 수용적 무욕가가 되는 편이 낫다. 바람이 밀어주는데로 밀려가다보면 순리가 목적지를 설정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능동적 야망가가 되지 못한다. '손흥민', '빌게이츠', '일론머스크'처럼 명확한 목표설정과 그것을 실행할 실행력이 능동적으로 받쳐주는 경우, 심지어 불어주는 순풍도 그 방향을 밀어주는 아주 기가막힌 상황에서 그들은 가끔 스타로 탄생한다.
나와 같은 범인에게는 불어주는 순풍을 거슬러 올라갈 만큼의 '능동적 에너지'가 채워져 있지 않다. 가끔 타오를 수 있는 열정은 있어도 불어오는 역풍을 모두 맞아가며 끝까지 거슬러 올라갈 자신은 없다. 이런 경우는 그저 불어오는 바람의 적기에 돛을 적당히 내리는 정도의 순응이 필요하다. 누군가들 처럼 역경을 이겨내고 몰아치는 역풍을 맞서 싸우며 운명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지만, 스스로 지켜보니 적당히 세상이 미는데로 움직이며 적당히 거스르고, 적당히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운전을 하다보면 항상 차가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곳에서는 거북이처럼 밀려 있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뻥하고 나만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처럼 길이 뚫려 있을 때가 있다. 상황이 좋지 못하면 그 상황에 적절하게 타협하고 여유있게 나아가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를 위한 길이 뚫려 있으면 그때서야 엑셀레이터를 힘차게 밟는 것이다. 상황이 나를 밀어주는 순간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외풍마저 스스로 조절하려는 것은 '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브루스올마이티'의 기도 응답이다. 그것은 내 역할이 아니다. 내 역할은 어쨌건 상황을 지켜보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그 상황에 쭈욱. 하고 진도를 빼는 것이다. 그것을 때로는 '기회'라고 한다. '기회'는 인간의 계산에 포함될 수 않는 변수다. 고로 이것 저것 기웃거리면서 다양한 반면에 공부를 하고 시도를 하며 뚫려 있는 길이 나오면 달려야 한다.
명마를 갖고 있다고 매순간 달려야하는 것은 아니다. 명마는 아주 중요한 순간에만 빠르게 달려나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