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면 1,000원. 동생 봐주면 1,000원. 먹고 싶은 간식 참아서 1,000원
1,000원 씩 차곡차곡 모은 5,000원을 쥐고 있다. '집에가면 청소 할당치를 채우겠다는 '약속어음 5,000원'까지 당겨 받아 두당 1만원씩 손에 쥐었다. 너무나 갖고 싶은 '펭귄 인형'을 발견한 모양이다. 아이의 손가락을 펴서 자기가 살 수 있는지 계산해 본다. 얼핏 만원은 넘어 보였다. 돈이 모자르다고 알려준다. 너무 갖고 싶어 한참을 서성인다. 대안을 알려준다. 하율이가 갖고 있는 1만원을 합치면 2만원이 되니, 둘이 반반으로 가지고 놀 수 있다는 대안이다. 다율이가 하율이를 찾아간다. 한참을 설득한다. 안타깝게도 설득에 실패했다. 다율이가 아빠에게 다가왔다. 하율이가 싫다고 했단다.
"그럼 어쩔 수 없는거야."
아이에게 사주지 않았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라고 했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투벅 투벅 쫒아오던 아이가 조용히 운다. 눈물을 닦아주고 말했다.
"어쩔 수 없는거야. 아빠도 사고 싶은 거 엄청 많은데 못 살 수도 있는거야."
아이는 조르지 않았다. 그냥 울기만 했다. 눈으로 간절하게 사달라고 이야기 하는 듯 했다. 그러나 눈물만 닦아주고 말했다.
"너무 사고 싶구나. 다음에 꼭 사야겠구나."
아이는 어느 정도를 울다가 아빠 손을 잡고 인형이 있는 자리로 갔다.
"아빠. 사진 찍어줘. 이거 사진 찍었다가 꼭 다시와서 살꺼야."
그렇게 찍힌 사진이다. 아이는 오늘 아침에도 이 사진을 확인했다. 그러나 사주지 않았다. 그리고 사주지 않을 예정이다.
아이에게 무엇을 사라, 무엇을 사지마라. 따지고들면 원망의 대상이 부모가 된다. 원인이 외부에 있으면 언제나 노력은 제쳐두고 원망만 하게 된다. 그러니 사거나 말거나를 정해주지 않았다. 돈만 쥐어준다. 돈이 있으면 살 수 있고,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간단한 시장주의 규칙만 알려준다.
얻는 것보다 놓는 것이 더 어렵다. 어느 정도 미친 척하고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어느정도 쉽게 다가온다. 놓는 것은 쉽지 않다.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얻는 것에 대한 훈련은 앞으로 학교나 사회에서 자주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중요하게 여기기에 스스로도 그 능력은 얻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놓는 연습이다. 얻고 싶지만 얻을 수 없다면 받아 드리기도 해야한다. 놓기도 해야한다. 나도 그것이 되어 있지 못하다.
인형이라면 집에 먼지알르레기가 날 만큼 많다. 그런 이유로 사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인형을 사기 위해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안다. 눈앞에 어른을 조르거나. 스스로 돈을 모을 것이다. 아이에게 시장은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를 닮았을 것이다. 그러나 '책'은 마음껏 사도 좋다고 분명 일렀다.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처럼 아이의 경제활동에 보완과 개입을 하기로 했다.
아이가 묻는다.
"아빠 이건 얼마짜리야?"
"모르면 못 사는 거야. 아빠도 몰라서 못 하는 거 많어."
아이에게 절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접어둔다. 뭐든 본인이 필요하면 하는 것이다. 쉽게 정답을 알려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원래 풀리지 않던 수학문제가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 아이에 대한 교육법이 옳은지는 모른다. 교육법이라고 대단한 것은 없다. 큰 핵심을 두자면 '자립'일 뿐이다. 아이가 학교에서 반 친구 누구보다 '상위'하길 기대하진 않는다.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사회가 어떻다는 것을 조금 더 이해하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 또한 스스로가 스스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유치원을 그만 둘 때, 사람들은 걱정하고 묻는다.
"아이 사회성 형성에 좋지 않을텐데요."
그 말이 정말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사회성 형성..'
물론 중요하다. 그러고보니 나는 유아원, 어린이집, 유치원을 모두 다녔다.
"그래. 맞아. 유치원을 다니지 않아도 좋겠어."
확신을 했다. 그 모든 과정을 다 다녔지만, 내가 사회성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그닥 들지 않는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단체 생활하는 것보다 혼자하는 것이 좋다.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 "사회성 참 좋다."는 칭찬을 해 준 적은 없다. 사회성은 유치원에서 얼마를 더 다녔다고 좋아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회성 형성에 가장 큰 문제는 '늦은 교우관계'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기본적인 역할과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생긴다. 보육시설은 아이의 사회성 발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산업사회가 변화하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만들어진 시설이다. 아이 교육이라는 핑계로 어쩌면 '보육서비스'를 받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라는 생각을 했다.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을 일도 없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통해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첫 아내에게 형편없는 남편이었고 이혼 위자료로 노벨상 전액을 지불했다. 모짜르트는 경제관념이 부족하여 젊은 나이에 빚을 지고 돌아다니다 마흔도 전에 요절했다. 반 고흐는 훌륭한 작품을 남긴 위인이지만 정신 착란증으로 귀를 자르는 기행을 저질렀고 스티브 잡스는 매정한 아버지로 기록됐다. 롯데 신격호 회장은 딸을 한국에 두고 일본에 정착하느라 아이의 성장 대부분을 놓쳤다. 이 분들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중요하고 훌륭한 분들이다. 그러나 내 딸이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보기에 따라 저주가 될수도 있다. '놈이대동'이라는 말이 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른다는 말.
그것은 대체로 좋지 못한 쪽으로 해석하지만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이 되야 할 까닭은 '사회와 타인'을 위해서지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일이 이기적인 일은 아니다. 아주 개인적인 욕심이라면 대단한 사람들이 사회화 세상에 있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우리 아이가 그렇게 되길 간절하게 빌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