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고전이 당신에게만 어려운 이유

나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by 오인환

우리는 '똑똑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옷'을 '임금'에게 판매한 아주 똑똑한 마케터를 알고 있다. 벌거 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제단사들이다. 이들은 어느날 임금에게 나타나 똑똑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옷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신하들은 중간 중간 제단사를 찾아가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멍청이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고로 옷이 보이는 것처럼 임금에게 보고한다. 다시 같은 이유로 다른 신화들이 찾아왔고 그들도 역시 옷이 보인다고 거짓말을 한다. 시간이 지나고 임금이 그 옷을 받게 된다. 모든 신하의 눈에는 보인다는 '이 옷'을 임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임금의 체통이 있어, 임금은 그것을 보인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신하들이 아름답다고 말한 옷이다. 모든 신하들이 극찬을 했다. 임금도 그 옷이 반드시 보여야했다. 제단사들은 임금에게 옷을 입히는 시늉을 한다. 임금 또한 옷 입는 시늉을 한다. 이후 옷을 입고 임금은 거리를 나선다. 시민 그 누구도 그 옷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모두가 보이는 옷을 자신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근엄한 표정으로 보이는 것처럼 시늉하다가 한 어린 아이가 소리친다.

"임금님이 벌거 벗었데요!"

그제서야 사람들은 옷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전을 읽으면 '벌거벗은 임금님'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증명된 책. 과연 그 책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그것을 읽고 커다란 감명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것이 임금님의 '똑똑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옷'과 같은 것은 아닐까. 만인에게 검증된 책이니,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멍청이'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임금님이 벌거 벗었다'고 외친 어린 아이와 닮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할 수는 없다. 내가 읽었던 책 중 그런 책들이 있다.

첫째,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고전을 읽으며 어떤 사람들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왜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 받았는지 이해가 된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 이야기를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실제 이상했다. 사람들은 여기에 상징주의를 담아 다양한 해석을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이상했다. 대사도 전여 개연성 없이 이어졌다. 그것을 많은 사람이 인정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책에 대해 조금 더 심도 있게 살펴보려고 했지만, 나의 턱 없는 문해력으로 그 책은 그냥 이상한 책이었다. 책에서 앨리스는 커지고 작아지고 물체가 왜곡되는 것을 경함한다. 이런 형태 왜곡 인식 현상을 실제, 소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은 경험했는데, 그는 의식변조 약물을 복용한 경험이 있었고 심한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 1955년 영국 외과의사인 J. Todd에 의해 논문으로 다뤄졌는데 이는 '이상한 나라의 증후군' 혹은 '토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영미권에서 흥미로운 소설인 이유는 다름 아닌, 언여 유희 때문이다. 가령 대사중에는

"내가 본 것은 고양이었어?"라는 대사가 있다. 당췌 그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이 대사를 영어로 바꿔보면 이렇다. "Was it a cat I saw?"

이 대사의 영어 스펠링을 거꾸로 쓰면 "Was it a cat I saw?"로 같은 말이 완성된다. 이 대사를 한국어로 보고 소설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면 그것은 '벌거벗은 임금님'과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라 차를 뜻하는 "Tea"와 발음이 비슷한 "T"를 이용한 언어 유희도 나온다. 이것을 한국어 버전의 소설로 읽고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에 공감하기 힘들다.


둘 째, 신곡.

이탈리아 작가 단테의 신곡은 이름이 무시무시하다. 인류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내가 그것을 읽고 그렇게 느꼈느냐 묻는다면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단테의 신곡은 역시 어렵다.'고 말하지만 내가 읽은 단테의 신곡은 어렵지 않았다. 이유는 이렇다. 단테의 신곡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일단 인물의 이름이 어렵다.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보다 모르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고로 어렵게 느껴진다. 그것은 당연하다. 1300년에 지어진 책에 등장하는 인물을 '상식'으로 모두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에 등장하는 인물에는 단테의 개인적 라이벌이 꽤 나온다. 우리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들 인물 정보를 검색해 보면 역사적인 정보가 나오지만 정보가 그렇게 문서화 되어 있으면 역시 무시무시해 보일 뿐이다. 이 책은 지옥을 묘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단테는 지옥을 갔다 온 적이 없다. 그가 묘사한 것은 상상일 뿐이다. 신곡에는 시대에 맞지 않는 등장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플라톤이나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고, 소크라테스나 카이사르도 등장한다. 그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런 이름들을 그저 가볍게 받아들이고 읽으면 단테의 신곡은 생각만큼 묵직한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묵직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나뉜다." - T.S 엘리엇.

"인간이 만든 최고의 작품"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모든 문학의 절정"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무시 무시한 사람들이 '극찬한 이 '신곡'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과연 '바보'가 될 것이다. 나는 확실히 '바보'이기에 '신곡'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겠다.

참고로 'T.S 엘리엇,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분명 대단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인물 중 괴테의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책도 읽어 본 적 없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작품인 '노인과 바다'가 여러 방법으로 해석되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그의 소설을 그저 노인과 바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노인과 바다'에 들어가는 '상징주의'에 대해 그저 독자의 몫으로 두었을 뿐이지 깊은 문학적 상징을 염두하고 쓴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떠오르는 감독과 뮤지션이 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대사는 '밥은 먹고 다니니?'다. 이 대사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두었지만, 실제 이는 송강호 배우의 애드립이었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는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대 출신의 가수의 노래라는 이유로 '청년 실업에 대한 사회 비판과 풍자'로 알려졌으나 정작, 작사할 때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고 직접 해명했다. 그 밖에도 '양희은' 가수의 '아침이슬'은 '민주화 운동'과 전혀 관련 없었음에도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로 알려졌고 가수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노무현 대통령 추모곡'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라는 영화의 테마곡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고전을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가령 '대체 그 많은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 글을 사랑했을까'

하며 그 글이 내포하는 많은 해석을 찾으려 든다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책속에 작가는 내용을 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책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사색하는 것은 독서를 풍요롭게 한다. 고전을 읽는 습관은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통해 다양한 사색을 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좋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을 모두 담고 있는 듯하다.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 이유가 나의 지성 탓인지, 혹은 그것과 그것을 평가하는 권위자의 권위에 의해, 없는 것을 찾아보겠다고 나섰기 때문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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