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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인의 글이 갖는 의미들_장소들

by 오인환

누군지 모르지만 최초의 언어를 사용한 인간은 '명사'부터 썼을 것이다. 무언가에 이름을 짓는 행위로 그것을 정의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의를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이 자신에게도 '이름'을 짓고, 상대에게도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이름 지어진 자신과 상대는 아이러니하게 그 이름에 갇혀 본질을 잃을 것이다. 언어는 본질을 멋대로 가둬 놓는 행위다. 피어 오르는 아지렁이를 아지렁이라고 부른다면 그 옅어지는 가장자리를 무어라 부를 것이며 그 가장자리의 가장자리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인간이 존재를 형용하려는 순간 대부분의 것들은 가차 없이 난도질되며 멋대로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칼로 잘려 나가진 본질의 외곽 부분은 부스러기가 되어 이름 조차 없이 무존재로 존재할 것이다. 고로 언어를 만진다는 꽤 날카로운 면도날을 다루는 일과 같다. 무언가 잘못 그어버리면 한뿌리 한뿌리가 동강나 버린다. 글을 쓰는 사람의 글의 칼날과 같으니, 시인의 글은 수술대에 올라선 외과의사의 상대를 닮았다. 미세한 감각으로 덜어낼 것과 그러지 않은 것들을 건들어내는 것이다. 물리학은 시공간이 관찰자에 의해 존재하거나 변용된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관찰자'로서 공간과 시간을 존재케 하고 변용케 한다. 그 위대한 업적을 매순간 매장소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라는 존재고 그 모호한 것을 대상을 수술대에 올려 놓고 섬세한 칼날로 본질을 들어내게 하는 것이 시인이다.

장소(場所)는 흙 위로 태양이 빛추는 글자, 장과(場),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를 의미하는 글자 소(所)가 합쳐진 글자다. 그것이 빛과 떨림을 모두 의미하니 조금더 깊게 보자면 양자역학처럼 존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어떤 장소를 단순히 면과 면이 만나는 3차원으로 기억할 수 없다. 우리는 거기에 시간이라는 1차원을 덧되어 4차원을 산다. 거기에 시간을 제거하면 단순히 그곳은 장소가 아니라 '공간'이 되어 버린다. 비어있는 사이. 아무런 의미를 상실한 비어있는 곳. 그것은 아무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어떤 장소를 보면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이 함께 머릿속에 그려질 때가 있다. 고로 장소에서 시간을 뺀다는 것은 모든 것을 비워 버리는 것과 같다. 등호를 사이에 두고 양변을 저울질해 보건데 그 값이 0이 된다면 장소는 곧 시간이 된다.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다. 단순히 공간으로 보이지 않고 시간으로 보이는 장소 말이다. 남들보다 꽤 다양한 곳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오죽이나 넓은지 지구를 몇 번을 돌았을지 모른다. 비행기의 속도로 12시간은 움직여야 도달하는 곳에도 나의 기억은 묻어 있다. 내가 공간을 이동하며 했던 생각은 그곳을 비어 있는 곳에서 가득찬 곳으로 바꾸었다. 비로소 장소가 됐다. 고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명사를 동사화하여 사용했다. Place라는 장소는 동사 위치에 두어, '두다. 놓다. 배열하다'의 의미로 사용했다. 나는 공간에 시간과 기억을 두고 왔다. 내가 그곳에서 했던 모든 행동들은 빛의 형태로 우주 전체로 산란되어 수백억 광년 우주 끝에 죽지 않고 정보로 도달할지 모른다. 그것은 우주 끝에 있는 누군가가 정보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그저 내 머릿속에서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가 사라질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있고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다.

'장소들'을 집필한 '류성훈' 시인의 글은 이미 출발지에서 광속으로 우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정보를 언어화하여 종이 위에 담아 두었다. 그 아련한 기억은 그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추억으로도 남아졌다. 작가는 아주 복잡한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함수를 짜놓은 상자와 같다. 어떤 값이 입력되면 작가의 시간과 공간, 기억은 아주 세밀하게 작동하여 완전히 새로운 것을 토해 놓는다. 안타깝지만 작가가 가지고 있는 함수는 그의 고뇌와 슬픔, 기쁨, 우울함, 즐거움의 다양한 감정에 기인한다.

고흐는 스스로 엄청난 고뇌를 지니고 살아가다가 정신병원에서 권총자살을 했지만 그의 고뇌는 현대인들에게 작잖은 인사이트를 남겼다. 모짜르트도 스스로 엄청난 작품을 남긴 작가지만 엄청난 빚을 지고 가난에 허덕였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30대에 도박으로 부모의 유산을 모두 날렸다.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 많은 빚을 졌고 성욕과 도박의 유혹에 쉽게 현혹됐다. 그의 젊은 시절은 쾌락과 그 뒤에 찾아오는 환멸감의 윤회였다. 그는 질투심이 많고 타인의 존경과 세상의 찬사를 갈망했다. 이런 세속적인 인생을 살던 이력이 그의 글을 '그의 글'답게 한다. 그는 결혼 이후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의 아내와 맞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다만 그 또한 스스로에게는 여러 고통을 주었겠지만 결국 자신을 더 자신스럽게 만들었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스께 소리로 하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있다.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결국 작가는 좋음과 나쁨의 어떤 선택에서도 글의 성향이 결정될 뿐이다. 류성훈 작가가 자신의 눈과 경험으로 소화하고 글로써 만들어낸 모든 경험들은 아주 미묘한 그만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찬찬히 읽다가 문뜩 누구의 글이었는지 기억이 가물한 나의 옛추억과 만나 완전히 새로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시인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시인의 글은 시인의 삶으로 완성된다. 고로 그의 글은 이미 쓰여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이고 앞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나아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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