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어플 즐겨찾기 5위
코끼리 어플리케이션 즐겨찾기 다섯 번째 순위에 '상상을 깨어버리다(금강경의 象)'이 올라와 있다. 앞으로 불경, 성경, 사서삼경을 차곡 차곡 업로드할 예정이다. 참고로 금강경의 상(相)과 한자는 다르다. 이 이야기는 상상(想像)하다로 시작한다. 사람이 상상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말한다. 곧이어 코끼리 상(象)이 나온다. 코끼리를 보지 못한 이들이 코끼리 뼈를 보고 형태를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이야기다. 여기에 쓰이는 '상'이라는 한자는 모두 다른 듯 하지만 그 출처와 어원을 살피면 거의 닮았다. 고로 '상'이라는 글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임의로 떠올리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명상(瞑想)은 무엇일까. 명상은 조용히 내면의 상(想)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상들은 무엇일까
상을 알기 위해 기본적으로 '언표'를 알아야 한다. 언표란 인간이 이름 짓는 행위다. 이름을 짓는 행위는 자칫 무언가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 같다. 아니다. 이름 짓는 행위는 무엇도 담아내지 못한다. 한강의 어느 부분을 가르키며 이름을 지었다고 해보자. 강은 그것을 가리킨 순간부터 끊임없이 흘러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 사과를 가르키며 '사과'라고 이름을 붙여보자. 그것은 사과일까. 알 수 없다. 그것을 사과라고 부르기로 했지만 그것은 흐르는 물처럼 실시간으로 변해간다. 아주 미세하게 일부는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일부는 먼지가 내려 앉을 것이다. 사과를 원자 현미경으로 살펴본다고 해보자. 그보다 더 좋은 장비로 측정한다고 해보자. 애플 스마트폰으로 사과를 사진찍고 그것을 줌으로 당겨내듯 그것을 점차 확대한다고 해보자. 그것이 원자 단위로 확대되면 사과를 이루는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원자핵과 전자로 이뤄진 원자는 실제로 99.9%의 공간이 비워져 있다. 99.9%의 빈공간으로 이루어진 원자를 최소 단위로 하는 사과는 얼마나 채워져 있을까. 그 또한 99.9%가 비워져 있다. 그것에 이름을 짓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공간일까.
모든 것은 비워져 있고 끊임없이 흐른다. 이는 '우리'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이루는 원자도 99.9% 비워져 있다. 머리카락은 끊임없이 자라고 잘라내고 물은 끊임없이 채우고 빠져나간다. 손톱도 자라고 잘리고 발톱도 자라고 잘린다. 피부는 죽고 다시 태어나며 표피에 각질은 떨어져 나간다. 몸속 유분은 끊임없이 나오고 음식은 끊임없이 들어가며 대변과 소변은 끊임없이 빠져나간다. 이것이 흐르는 강물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흐르는 강물은 과연 이름 짓는다고 그것이 그것일까. 흐르는 강물이 끝에 바다와 만난다면 그것은 바닷물일까. 강물일까. 어디까지가 강물이고 어디까지가 바닷물일까. 이것은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현대물리학의 최대 난제와 닮았다. 거시세계 역학과 양자역학은 아주 판이하게 다른 역학규칙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양자역학의 규칙이 적용되고 어디서 부터 거시세계의 역학이 적용될까. 알 수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나라고 규정할 것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남이라고 규정할 것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삶이라고 규정하고,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를 죽음이라고 규정할까.
태어나면서 1살이라는 한국 나이를 들으면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사고 방식에 놀란다. 세상을 만나기 전, 부모 뱃속에서 씨앗으로 성장하던 그 10개월을 1년의 삶으로 생각했다는 발상이 놀랍다는 것이다. 어미의 뱃속에서 세상밖으로 나온 순간이 삶의 시작일까. 그렇다면 어미 뱃속에서 나오기 1초 전의 상태는 무슨 상태로 볼 수 있나. 대체로 이름은 태어난 뒤에 짓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태어나기 전 상태는 이름도 없고 존재도 불명확한 무언가가 된다.
죽음은 또 어떤가. 뇌가 죽은 뇌사는 죽음으로 볼 수 있는가. 뇌는 살고 몸이 죽은 식물인간은 죽음으로 볼 수 있는가.
Caenorhabditis elegans라는 선형동물이 있다. 우리말로 예쁜꼬마선충. 이것은 인간이 모든 뉴런 정보를 알고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즉 유일한 생물이다. 인간은 이 예쁜꼬마선충의 뇌신경회로를 데이터로 구현하여 로봇에 업로드했다. 고로 로봇은 생명이 됐다. 그것은 이제 생명일까. 알 수 없다. 모호한 어떤 것에 이름을 붙여 그것이라고 정하는 것은 본질을 훼손한다. 피어오르는 아지렁이를 '아지렁이'라고 부른다면 그 가장자리는 어떻게 구분할까. 그 가장자리의 가장자리는 어떻게 구분할 것이고, 또 그것의 가장자리는 무엇으로 구분할까. 모든 것은 천천히 섞여가는 하나 덩어리일 뿐, 시작도 끝도 삶도 죽음도, 나도 너도 없는 모호한 덩어리다. 그것이 단단한 형태가 지어져 있다고 믿는 것은 '관념'에서만 존재한다. 그것을 깨버리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