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선생의 '노자가 옳았다'를 보면 '언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언표란 '실재'를 '언어화'하는 것이다. 쉽게 해 '빛'을 이야기 해보자. 촛불에 불을 붙여 빛을 바라보자. 촛불이 만들어낸 '빛'. 당신은 '빛'을 보고 있는가? 알 수 없다. '빛'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차츰 그라데이션 되는 명암의 농도에서 어디부터 빛인가. 어디까지가 빛인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사랑'이라는 언어를 살펴보자. 사랑이란 감정은 언어화 할 수 있을까. 사랑은 어떤 이성을 봤을 때, 설레거나 떨리는 감정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부모에 관한 감정일수도 있다. 얼굴에 홍조가 띠고 입이 바싹 마르는 경험일 수도 있고, 분해지면서 편안해 지는 경험일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감정을 깍둑썰기로 동강내어 하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추상명사뿐만 아니라 일반명사도 비슷하다. '사람'을 다른 예로 들어보자. '사람'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가 사람인가. 그리고 어디까지가 사람인가. 정자와 난자가 만난 순간부터가 사람인가. 태아가 신체의 일부가 어머니에서 노출된 시기부터가 사람인가. 분만이 완성되어 태아가 모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기부터가 사람인가. 태아가 모체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태만에 의한 호흡을 멈추고 스스로 폐에 의한 호흡을 할 때부터가 사람인가.
다시 어디까지가 사람인가. 호흡이 영구적으로 그칠 때 까지가 사람일까. 심장의 고동이 영구적을 정지했을 때까지가 사람일까. 뇌기능이 정지된 상태까지가 사람일까. 이처럼 우리가 언어화한 것은 모두 우리의 지성의 크기대로 대상을 난도질하여 형편없이 일반화한 모호한 덩어리일 뿐이다. 고로 세상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고난'도 '슬픔'도 없으며, '사랑'도 '증오'도, '행복'도 '불행'도 없다. 모두 다 모호하고 불완전한 어떤 것에 이름 짓는 행위일 뿐이며 모두 관념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고로 실재한다고 믿는 것에는 어떤 언어적 이름도 지을 수 없으며 그것은 허상일 뿐이다. 허상이란 가짜로 만들어진 '상'으로 거울에 비친 모습과 같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실제'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실재를 반사한 광자가 망막에 부딪쳐 미세함 떨림을 감지하여 '정보' 단위로 '뇌'에 보내는 신호일 뿐이다. 고로 실재와 허상은 한끗 차이이며 그것은 모두 '정보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물이 반 정도 차 있는 컵을 보고 '반 밖에 없네'라고 생각하든, '반이나 있네'라고 생각하든. 물인 반 정도 차 있다는 절대적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실재를 정보화하는 과정에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하게 달라진다. 저 멀리 태산이 곧게 서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하더라도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그 태산은 '무존재'의 영역일 뿐이며 그것은 또다른 누군가의 우주일 수 있다. 말이 어렵지만 사람은 자신이 믿는 세상을 살 뿐이며, 모든 실재는 자신이 '해석'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죽은 바퀴벌레를 카펫 밑으로 밀어 넣어 완전히 그것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을 때, 그것을 알고 있는 자와 그것을 모르는 자는 같은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설령 그 바퀴벌레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동등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관념'은 그 공간을 지저분하게 인식할 것이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영역의 지저분함은 때로 누군가에게는 완벽한 '무지'의 상태일 것이고 그것은 그 공간을 청결하게 만들기도 한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을 들어간다고 해보자. 한 사람에게는 카펫 밑에 바퀴벌레의 시체가 있다고 알려두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알려주지 말자. 실제 카펫 밑에 바퀴벌레가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 공간에서 굉장한 불쾌함을 가질 것이다. 관념이 만들어낸 허상이 공간으로 확장됐을 때, 그 공간은 분명, '더러운 공간'으로 바뀐다. 밖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삶이 당신에게 레몬을 준다면,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
당신은 이 말에서 삶이 어떤 재료를 주던 그것을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내라는 의미로 받아 드릴지도 모른다. 여기에 하나의 변화를 줘보자. '레몬'은 영어로 '불량품'이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제 앞선 문장의 의미는 더 풍부하게 들린다.
비슷한 예시도 있다.
"빛 속에 있으면 모든 것이 따라오지만,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당신 그림자조차 당신을 따라오지 않는다."
이 말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따르라. 그리고 정상에 올라서 규칙을 바꾸라."
이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두 말은 아돌프 히틀러의 말이다. 이 말은 이제 어떻게 느껴지나. 언어라는 것은 오롯하게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실재를 모방하여 허상을 만들고 그것을 전달하여 다른 누군가에게 그 허상을 옮겨 심는다. 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그저 허상일 뿐이다. 그것에 사로잡혀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신용, 돈, 빚, 부, 빈곤, 약속, 결혼, 사랑, 슬픔, 행복, 미래, 학력, 국적, 성별'
현대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은 관념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일부는 불과 100년 전만 돌아가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것은 500년, 어떤 것은 1000년이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유통기한도 무한은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수가 언어와 언어로 합의한 허상의 존재물일 뿐이다. 빚과 과거, 학력, 성별, 신용 따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당신을 구속하지 않으며, 당신을 구속하는 것은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는 착각 때문이다.
지갑에 10억을 가진 검소한 이와, 지갑에 10원이 있는 가난한 이의 차이는 서로 머릿속에 가진 관념의 차이일 뿐이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