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이는 비교적 큰 세계가 움직이는 규칙을 '고전역학'이라 부른다. 반대로 분자, 전자, 원자처럼 아주 작은 세계가 움직이는 것을 '양자역학'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가 아니다. 둘다 우리가 사는 하나의 세계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이 두 역학이 통합되는 하나의 역학이론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어디서부터 고전물리학의 역학이 적용되고, 어디서부터 양자물리학의 역학이 적용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 두 역학 관계를 통합하는 하나의 역학 이론은 아직 찾지 못했다. 이것을 찾는 것은 현대 인류의 난제 중 하나다. 고전역학에서는 물체의 위치, 속도, 운동량, 힘 등을 알면 수학적 방정식을 통해 비교적 정확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반면 양자역학에서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것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을 '양자역학의 불확실성 원리'이라 한다. 측정할 수 없는 두 변수, 위치와 운동량 사이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며, 한 변수를 정확하게 측정하면 다른 변수의 불확실성이 증가한다.
쉽게 설명해보자. 만약 축구공을 발로 걷어찬다고 하자. 축구공은 발에 맞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때 축구공이 날아가는 위치와 운동량을 안다면 1초 뒤에 축구공이 어디에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더 진행하여 2초 뒤에 어디에 가 있을지도 알 수 있다. 이는 정확한 수학 방정식에 따라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양자역학에서는 축구공을 발로 찬다고 해보자. 축구공이 날아가서 공중 어딘가에 있다고 해보자. 만약 그 축구공이 위치를 파악하는 순간, 축구공의 운동량은 예측 불가가 된다. 쉽게 말해 불확실하다. 반대로 이번에는 운동량을 확인해보자. 축구공의 운동량을 확인해보자. 운동량이 확인되면 이번에는 축구공의 위치가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확률로만 존재한다.
쉬울 수 없지만 더 쉽게 말해보자. 양자역학에서 '헤이즌버그'의 불확실성의 원리에 따라 '운동량'과 '위치'를 정확하게 동시에 알 수는 없다. 하나를 알게 되면 다른 하나의 불확실성이 올라간다.
쉽게 말하면 고전역학은 미지수가 하나인 방정식, 양자역학은 미지수가 2개인 방정식이다. '딱 떨어지는 정답이 나오지 않는 양자역학의 원리가 내 철학을 닮았다. 그것이 무슨말인가 하면 이렇다.
나의 자동차의 색은 빨간색이다. 내 자동차 색이 빨간색인 이유는 내가 빨간색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다. 나는 내가 빨간색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빨간색을 선택한다. 옷이나 휴대폰, 자동차를 고를 때, 보통 나는 무난한 것을 취향으로 여긴다. 그러나 선택은 그와 반대로 한다. 물론 그 또한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이처럼 내가 갖고 있는 진행 방향과 속도에 따라 관성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을 나는 극혐한다. 지나온 삶의 방향을 볼 때, 꼭 그렇게 할 것 같은 것을 한 번 비틀면 거기서 느껴지는 삶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운명이 정해준 삶의 방향에 스스로 불확실성을 대입하여 완전한 주체성을 갖는다는 묘한 쾌감이 있다. 물론 그마저 '운명'의 한조각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지금까지 그래와서 그렇게 해야한다는 관성적인 선택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주 세심하게 계획을 짜고 행동을 하다가 난데없이 계획을 어그러트리거나 완전히 바꿔 버린다.
짐 캐리의 영화, '예스맨'을 보면 항상 '노'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삶이 '예스'라고 말하며 바뀌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선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선 상에 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과거, 현재와 다른 미래를 그린다. 물론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같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런 선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어제와 오늘이 같으며 내일이 다르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말마따나 정신병 초기 증세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이런 법칙은 굉장히 유효하다. 가장 좋아하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난데없이 '연애소설'을 고른다거나,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베트남의 역사', '양자역학', '음악사' 혹은 '미술사'를 선택한다. 내가 관성적으로 선택할 것 같지 않은 것을 선택함으로써, 전혀 다른 세계가 내 삶으로 다가온다.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관심을 가져 보지 않을 것에 관심을 가져보고 공부해본다. 죽을 때까지 한번도 궁금해 보지 않은 일들을 해본다. 원래의 나라면 선택하지 않을 것들을 선택하고, 하지 않을 것들을 해본다. 그러다보니 온라인이던 오프라인이던 전혀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들에게 나를 알리게 된다. 팔자에 없는 유학, 수출, 책출간, 강연을 다녀보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어느 곳에 취업해 관리자로써 있어보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동네에 살면서 잘난 사람들 틈바구니에 기가 꺾어보기도 하고 변기와 침대가 붙어 있는 한 평짜리 고시원에서 담배냄새에 고통스러워 보기도 했다. 세금의 '세'자도 모르고 사업을 했다가, 세금폭탄을 맞고 수 년을 수습하느라 살아보기도 하고 사람을 채용해보기도 하고, 잘라보고, 취직해보기도 하고, 갑이 됐다가 철저하게 을이 되기도 했다. 대형 연예기획사에서 진행하는 오디션에 참가하기도 하고, 다양한 플랫폼에서 나의 생각을 응원해주는 팔로워를 모으기도 한다. 스스로도 도대체 어디로 진행될지 모르는 삶을 살다보니 이제는 갑작스럽게 다른 내일을 맞이해도 크게 거부감이 없다. 어차피 삶은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요동치는 커다란 항해와 같다. 가만히 있으면서 순풍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가 나름 변칙적인 삶을 살았다가, 별짓을 다하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 이유는 어차피 그래봐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90세 노인이 되어 이도 없고, 팔다리가 성치못해 아무것도 못할 때는 고급 승용차와 넓은 집이 아니라, 떠올릴 추억이 많아야 한다. 통장 잔고에 평생 쓰지 못할 돈을 모으는 것만큼 경험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다. 혹시 아는가. 경험을 모았는데 평생 쓰지 못할 통장 잔고도 그 경험 중 하나가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