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바람이 불고 눈, 비가 내려도 햇빛이 똑같이 비춰도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어느 창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렇다. 창안의 온도가 어떤지에 따라 그렇다. 창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떤지에 따라 그렇다. 훈훈한 창 안쪽에서 가족들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바라보게 되는 창 밖 풍경은 눈보라 마져도 따뜻하게 보인다.
어릴 때는 단풍을 보며, '빨갛구나' 하다가, 젊을 때는 '예쁘구나.'하다가, 나이가 조금 들어서는 '덧 없구나'하고 느끼는 걸 보면, 같은 걸 보고도 다르게 느끼는 것이,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만은 아닌듯 하다.
천둥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날에는 방음된 샤시문을 닫고 평온함을 느낀다. 무서운 비바람과 천둥 번개에도 보호 받는 안정감이 때로는 날 맑을 어느날 보다 더 차분해진다. 가만히 서서 창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때로는 시간이 흘러 지나가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그 모든 것의 관찰자가 되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여, 언제고 밖을 비추고 있다. 눈안은 때로 창과 닮아, 그것을 지켜보는 나를 숨겨주는 곳이다. 나는 눈이 비추는 세상의 안쪽에서 적막하고 고요한 상태로 밖을 바라본다. 그것이 무엇을 비춰도 '그렇구나'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면, 밖으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때로는 비가 와서 외꺼풀 피부와 옷을 적셔도 눈 안쪽, 내면의 나는 고요하게 그것들에 보호 받는다.
단풍이 빨갛다고 생각하든, 단풍이 예쁘다고 생각하든, 때로 단풍을 보며 덧 없다고 생각하든. 단풍에게는 사랑도 시기도, 탓도 하지 않으며 지금 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살핀다. 밖을 스쳐가는 모든 자연의 원리가 변화무쌍이라 변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바라보는 안쪽의 원리도 변화무쌍이라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창밖의 모습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노하지 않고, 창안의 내가 창밖을 보며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 무엇을 바라 보고도 다르게 느낄 수 있고, 또한 그 내부가 차분하면 그 무엇을 바라보더라도 안정감을 갖는다.
원경 스님의 시, '창'에는 창을 내신 '그대'가 등장한다. 안전하게 나를 보호하는 외꺼풀에서 유일하게 밖을 볼 수 있게 내어 놓은 '창'도 누군가의 산물이기에 '창'을 내어주신 누군가를 축복하고 창의 안쪽에서 따뜻하고 안전한 내면을 만든 다른 누군가에게도 감사함을 느낀다. 누군가라면 어쩌면 '부모, 형제, 신, 연인' 누구라도 될 수 있고 그 여럿이 함께 일수도 있으나 그 고운 창을 내신 이의 손결을 축복한다.
창
계절이 흐르는 창에는
이웃의 일상이 흐르고
생각이 많을 땐
사유가 흐르고
휴식이 필요할 땐
차향이 피어나고
나의 기도가 깊어질 땐
빛빛마저 모여든다
이 고운 창을 내신 그대
그 손결 빛나셔라
원경 스님의 시를 읽고 생각이 깊어진다. 원경스님의 글과 김인중 신부 님의 그림은 무지한 내면으로 들어와 빛이 된 듯하다.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다. 창은 어두운 내부로 빛을 허락하는 유일한 창구이고 그 빛은 어떤 형태를 띄더라도 빛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