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책]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_사용자의 자유

by 오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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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가 입자를 때리면, 광자는 튕겨져 나와 각막, 수정체로 들어온다. 여기서 망막 시신경을 통해 '전기신호'가 만들어진다. 뇌는 '전기 신호'만 인식한다. 본다는 것은 다시 말해 '정보'를 전기 신호로 인식하는 것이다.


음파가 공기를 진동시키면, 진동은 귓바퀴로 들어와 내이에 전달된다. 내이의 달팽이관은 이를 '전기신호'로 바꾼다. 뇌는 '전기 신호'만 인식한다. 고로 듣는다는 것은 전기를 인식하는 것이다.


피부의 전자와 물체의 전자는 마이너스극을 하고 있다. 같은 극은 서로 밀어낸다. 서로의 반발력으로 서로를 밀어내면 진피 안에 있는 '수용기'들은 압력을 감지하여 전기신호를 만든다. 뇌는 '전기 신호'만 인식한다. 만진다는 것은 '정보'를 전기신호로 인식하는 것이다.


액체 상태의 물질이 입으로 들어오면, 혀표면을 자극한다. 혀표면의 '미뢰'는 이를 전기신호로 바꾼다. 뇌는 '전기 신호'만 인식한다. 맛본다는 것은 전기 신호를 인식하는 것이다.


작은 입자가 화학적 성질을 갖고 공기 중을 날아다니다, 콧구멍으로 들어온다. 이 화학분자는 콧속 점막에 달라붙고 후각 수용체를 자극한다. 후각수용체는 이를 '전기 신호'로 변환하여 뇌로 보낸다. 다시 뇌는 '전기 신호만' 인식한다. 냄새 맡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전기 신호로 인식하는 것이다.


들어온 정보들은 어쨌건 뉴런이라는 신경세포를 통해 전기신호를 전달한다. 결국 뇌는 전기를 해석하는 기관이다. 반대로 뇌는 전기를 발생하여 그 전기신호를 '뉴런'이라는 전선으로 흘려 보낸다. 이렇게 흘러간 전기가 근육섬유에 도착하면, 근섬유는 전기 자극에 의해 수축하고 근육이 수축된 방향으로 관절이 움직인다. 인간의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운동 및 육체 활동은 뇌가 '전기신호'를 통해 만든다. 다시말해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거의 모든 것은 '전기 신호'에 의존된다.



인식은 정보이고 정보는 전기다. 경험은 정보이고 정보는 전기다. 전기 신호는 단순히 정보만 전달한다. 전기의 속도는 매우 빠르지만 매질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km다. 전기 속도는 매질에 따라 그보다 훨씬 느려진다. 다시말해 빛으로 전달하는 정보마저 그 딜레이가 존재하고 전기로 전달되는 정보의 딜레이는 빛보다 훨씬 크다. 즉, 모든 것에는 딜레이가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과거이며 즉각적인 현재라는 것은 '전기 신호'로 발생하지 않는 오롯한 '관찰자'에서만 존재한다. 관찰자는 사용자다. 사용자는 다시말해 이용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전기를 이용하는 이들은 전기가 화력발전에서 출발했는지, 원자력 발전에서 출발했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사용자는 주어진 전기를 사용할 뿐이다. 공급자가 전기를 생성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들고 증기가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어떤 방식으로 물을 끓이는지는 중요치 않다. 핵분열을 통해 원자가 쪼개지는 반응 속도에서 열을 얻어 물을 끓이던, 화학연료를 태워 물을 끌이던, 심지어 땅속의 지열을 이용하여 물을 끓이던 물을 끓이기만 하면 된다. 물이 끓기만 하면 물은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는 터빈을 돌린다. 터빈이 돌아가면 전기가 생성되고 그것은 전선이라는 매질을 통해 사용자에게 전달된다. 어떤 방식으로 터빈을 돌리건, 어떤 방식으로 물을 끓이건 그것은 중요치 않다. 사용자가 전기를 받고나면 사용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으로 음식을 데워먹거나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도 있고 영화를 시청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했는지, 어떤 목적으로 전기를 생산했는지와 상관없다. 사용자는 단순히 전기를 사용할 뿐이다. 화석연료를 태운 전기는 나쁘고, 천연가스로 태운 전기는 좋다는 것 따위는 없다. 그것은 공급자의 역할일 뿐이며 사용자는 그저 사용할 뿐이다.



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누군가는 그것으로 요리를 하고, 누군가는 그것으로 '사형집행'하는 전기의자를 만든다. 때로 그 전기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해치기도 하고, 스스로를 구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진 전기인지에 구애받는 것이 아니다. 사용자는 전기의 원초적 원리를 이용할 뿐이며 그것의 생성방식에 구애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보고 듣는다. 그것은 때로 그저 정보가 만든 전기 작용일 뿐이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했던 그것을 사용하고 해석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사용방식에 따른다. 사용법은 자유다. 질병, 이혼, 사별, 괴로움, 빚, 성공, 실패, 파산, 불화, 다툼, 고통 모든 것은 외부 정보를 전기신호로 변환하여 뇌속으로 정보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의 원료가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모든 전기신호는 사용자가 사용하기 나름이며 이는 사용자의 자유다. 다시말하자면 모든 것은 사용자의 자유다. 누군가는 화력발전을 통해 얻는 전기로 물을 끄고, 어떤 누군가는 수력발전을 통해 얻는 전기로 불을 붙이기도 한다. 이는 화력이냐, 수력이냐의 문제가 아니며 사용자의 문제일 뿐이다. 고로 삶이라는 것은 오롯하게 외부적인 것과 별개의 내부적인 것이고 그것으 전부이다. 우주가 얼마나 넓고 얼마나 광대하던 알빠 없다. 그것은 어쨌건 나에게는 전기 신호로 해석될 뿐이며, 인식하지 않으면 인식되지 않는 한낫 정보일 뿐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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