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공은 바람을 빼도 축구공이다. 페트병은 찌그러 뜨려도 페트병이다. 기하학에서 찢거나 붙이지 않고 구부리거나 늘려서 형태를 변형하는 것을 '위상동형'이라고 한다. 위상동형에 따르면 빨대와 도너츠는 서로 같다. 도너츠를 길게 늘이면 빨대가 된다. 고로 서로 같다. 그러나 여기서 인식의 왜곡이 발생한다. 도너츠일 때는 하나의 구멍이었던 것이, 그것을 늘려 빨대 모양으로 만들면 입구와 출구, 두 개의 구멍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더 길게 늘려 10미터 짜리 호수로 만들면 그 인식은 더욱 확실해진다. 만약 그것을 수십 km로 늘린다고 해보자. 그러면 두 개의 구멍은 완전히 독자적인 것처럼 보여질 뿐이다. 그러나 역시 본질적으로 구멍은 하나 일 뿐이다. 그것이 위상동형이다.
스티븐 호킹 박사에 따르면 우주 전체의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를 합하면 0이 된다. 조금 어려운 개념인데, '쌍생성'이라고 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에너지와 운동량이 보존되는 개념인데, 입자가 생성되면 반입자가 생성되어 모든 양자수의 합이 0이 되는 것 이다. 우주를 보면 빈 공간이 상당히 많다. 빈 공간은 정말로 비어 있는 것일가?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은 실제로 비어 있지 않다. 징공 상태의 공간에서는 끊임 없는 창조와 소멸이 일어난다. 빈 공간에서는 끊임없이 양의 소립자와 음의 반입자가 생성되었다가 만나서 소멸하기를 반복한다. 즉 비어있는 공간은 다시 가득차있는 공간이다. 이를 '양자요동'이라고 한다. 일상 생활의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애플에서 출시한 '에어팟'에는 '노이즈 캔슬링'이라는 기능이 있다. 이 기능을 켜두면 신기하게도 주변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리는 파동이다. 고로 그 파동의 역방향으로 파동을 주면 파동은 상쇄된다. 쉽게 말해 +1의 파동에 -1을 임의로 생성하여 만들어주면 파동은 0이 된다. 이 원리로 노이즈 캔슬링은 주변 소리를 상쇄시켜 버린다.
양자 요동은 무수하게 많은 출렁임들이 반대 출렁임을 만나 소멸되는 현상이다. 빅뱅이 일어나기 전 '우주'도 이와 같았다.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 우주는 양자요동에 의해 열적 평등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 그것이 우주의 지평 밖으로 밀려나면서 '무'라는 것이 '유'라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물질요동이 일어난다. 쉽게 말해 우주의 모든 값을 더하면 결국 '0'이다.
우주는 0이라는 모형의 '위상동형'이다. 그것의 길이가 길고 짧을 뿐이다. 태어남과 죽음을 예로 들어보자. 태어난다면 반드시 죽는다. 태어남이라는 시작점과 죽음이라는 끝점은 실제로 그 간격이 100년에 가깝기에 완전히 다른 것으로 여긴다. 다만 시작점과 끝점은 단순히 과정이 길어진 '무'의 위상동형이다. '죽음'은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태어남'도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태어남'이라는 반대쪽이 존재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만남'과 '이별'도 그렇다. '이별'은 나쁜 것, 만남은 '좋은 것'이라지만, 그렇지 않다. 만남과 이별은 이어져있는 하나의 구멍일 뿐, 두 개의 다른 점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둔하게 이 둘을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시작과 끝은 하나다. 태어남과 죽음도 하나다. 만남과 이별도 하나다. 고대 동양 철학은 이를 두고 '없다' 혹은 '비어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노자 사상이건 붓다 사상이건 모든 것은 없음의 위상동형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슬픔이다. 그것에 슬퍼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있다. 슬픔과 기쁨은 그 모양이 '없음'의 위상동형이다. 고로 슬픔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이 컸음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슬픔이 크다는 것은 받은 기쁨이 크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우주는 '보존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균형을 유지한다. 빌려주면 받고, 받았으면 빌려줘야 한다. 결국 어떻게든 0이라는 값을 맞춰냄으로 기쁘다고 좋아할 이유도, 슬프다고 나빠할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은 0의 위상동형이다. 남자와 여자, 겉과 속, 뜨거움과 차가움, 어둠과 밝음, 삶과 죽음. 모든 것은 결국 끝점과 시작점의 구멍으로 보이지만 이 둘은 원래 하나이며 그 하나의 위상동형이다. 그 하나라는 것은 '0'이다.
앞으로 미는 힘과 뒤로 미는 힘이 같으면 문은 가만히 정체되어 있어 보인다. 일시적으로 그것의 균형이 틀어지면 이내 앞으로나 뒤로 잠시 흔들릴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점차 균형을 맞추며 결국 0으로 수렴한다. 살면서 '억울한 일'은 없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수 만가지 고뇌도 있다. 그런 모든 것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다만 그것을 피한다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통이라면 반대편의 어떤 것도 오게 되지 않을까. 물론 거기에는 시간차이가 존재한다. 끓는 물이 식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의 시간이 존재한다. 엄청나게 길게 늘어 놓은 호수처럼, 그 간격이 길어지면 우리는 줄곧 그것이 하나였음을 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길게 이어진다 한듯 그 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고로 모든 것은 하나이며 돌도 돈다. 그것은 '윤회'라고 부르던, '도'라고 부르던, 새옹지마라고 부르던, 그것은 그것을 담는 언어의 역할이겠지만, 결론적으로 모든 것은 '없음'의 위상동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