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다른 증상은 없다. 맑은 공기에 단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그렇다. 그냥 신경성인가 싶다. 가만히 기다렸다. 참지 못하고 '타이레놀' 두 정을 삼켰다. 플라시보든 뭐든, 빨리 효과가 오길 바랬다.
다음 딸꾹질을 기다리다보면 어느새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두통의 감각을 세밀하게 느껴봤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해소되는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우직끈 조여온다. 최근 그렇다. 비염도 심했고 두드러기도 올라왔다. 불규칙한 생활 패턴이 그 죄라 생각됐다. 일단 가지고 있는 패를 바닥에 '쫙' 나열해 놨다. 하나씩 정리하기로 했다.
해야 할 것 '리스트', 하고 싶은 것 '리스트', 잘하는 것 '리스트'
그 리스트를 짰다. 속도 위반 벌칙금을 먼저 납부해야 했다. 정산하지 못한 몇가지를 정산하고 답장해야 할 메일과 문자에 답장했다. 짜잘한 것에서부터 굵직한 것까지 한 가득이다. 그것들을 머리에 얹고 살았으니, 그 무게가 위에서 아래로 눌려진 느낌이다. 하나, 둘 꺼내어 버릴 건 버리고 처리할 건 처리했다. 1.4kg이라는 뇌의 무게가 14kg는 된 듯 하다. 구분하여 한참을 버린다. 조금씩 가벼워진다. 잔잔한 데이터가 묵직하게 쌓여 자리를 비워내자, 그 자리로 혈액이 물 밀듯, 들어온다. 어쩌면, 타이레놀 2정이 위액에 녹아 소장에서 흡수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혈액을 타고 돌고 있는 모양이다. 몇 줄의 글을 쓰는 사이에 두통은 잊혀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머릿속 부담을 종이에 내려 놨다. 그래서 편해졌다고 믿고 싶다.
어제는 아이들과 동네 놀이터를 다녀왔다. 아이가 미끄럼틀 밑에서 부스럭 거린다. 얼마 뒤에 '도토리 팔아요.'라는 소리가 들린다.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배달서비스'라고 아이가 도토리를 가져왔다. 어린시절에는 그것을 '제밤'이라고 불렀다. 제밤은 찾아보니 '조밤'의 사투리였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기억이다. 저것을 앞니로 물어서 세로로 깨놓으면 속에는 하얀 알맹이가 나온다. 그것을 먹곤 했다. 간혹 썩은 걸 먹게 되면 떫은 혀가 되어 한참을 고생했다. 물로 씻어 먹은 기억은 없다. 그냥 그걸 주워다가 앞니로 깨어 먹었다. 아이 앞에서 먹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이는 더러운 걸 주워 먹었다고 난리다. 언제부턴가 '과잉보호'가 표준이 됐다. 내가 초등학교 때, 쉰 살도 넘은 선생님은 아이들을 향해서 의자를 집어 던지셨다. 그 의자가 책상에 맞고 튕겨져 누군가에게 갔다. 그것을 받은 쪽은 그저 운이 나쁜 쪽이었다. 소각장에서 수위 아저씨는 '탈 것'에 콜라캔이 들어가 있다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복부를 발로 찼다. 또한 아주 높은 확률로 뺨을 후려 갈기곤 했는데, 그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이들은 휘청이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손 치더라도 '네가 뭔가 잘못했겠지'라는 꾸지람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는 그랬다. 동백꽃을 따다가 그 뒷구멍을 핥아 먹기도 했다. 비파 나무에 올라서 비파를 따먹기도 했다. 나보다 촌에 살던 녀석들의 일화는 더욱 놀랍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읍내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더 외지 초등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듣고 믿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시멘트 바닥을 '스르륵' 기어다니는 뱀의 꼬리를 잡아다가 360도를 돌린 뒤, 하늘로 집어 던지곤 했다. 남의 밭, 귤농장에 들어가서 몰래 불을 피워서 고구마를 구워 먹다가 붙잡힌 아이도 있었다. 기억으로 아이와 일행은 그날 하루 종일, 그 농장의 감귤 컨테이너를 나르는 '노동'으로 죄값을 지불했다. 다시 '제밤'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생각해보건데, 요즘은 너무 과잉보호가 표준이 됐다. 아이가 귀한 시대가 되서 그런지, 모든 어른이 달라 붙어, 아이를 케어한다. 그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한쯤 깨물은 제밤을 아이의 입에 넣었다. 아이는 맛이 없다고 '퉤'하고 뱉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싱크대' 찻장에 숨겨 둔 과자를 꺼내 먹을 것이다. 아마 태블릿으로 만화를 볼지 모른다.
우리집 TV는 채널을 돌리는 손잡이가 부러졌었다. 반달모양의 하얀 플라스틱만 뽀족하게 노출되어 있으면 그것을 돌리는 유일한 방법은 TV 위에 있던 '뺀찌'로 '흰 무언가'를 잡아다가 겨우 돌리는 것이었다. 채널은 mbc와 kbs1, kbs2만 나왔는데, 사촌집에 있는 유선방송을 몹시 부러워 했던 기억이 있다. 유선방송이라고 해봐야 SBS가 유일했다. 사촌이 '순풍산부인과'의 주인공 이름을 줄줄 외울 때, 그 시셈으로 나는 '지지직'거리는 TV의 채널을 한참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우연히 '지지직'거리는 화면과 EBS의 화면이 같이 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기분은 내가 처음으로 전기로 가는 차를 샀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어린시절의 나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도, 지금 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연탄으로 불을 떼고 눈길에 연탄재를 뿌리던 시절과 스마트폰으로 인공지능에게 날씨를 묻는 시대를 같이 살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참 행운스럽기도 하다. 머리가 지끈거리던 것이 풀리니, 술술하고 나오지 않는 추억거리가 없다. 아무튼 문뜩 그렇다. 머리도 가끔 아프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