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육아] 원래 자연계에서 부모는 '평화'가 아니라

'사냥법'을 가르친다_아이 싸움 중재법

by 오인환

아이가 머리가 커가면 싸움이 잦아진다. 싸움이 잦아지면 중재자를 찾는다.

나는 어떤 중재자인가.

부모에게 '고발'하는 '고발자를 '원고'라고 하고, 고발을 당하는 '피고발자'를 '피고'라고 하자.

원고는 억울한 사람일 수 있다. 다만, 항상 그렇진 않다. 때에 따라 먼저 고발한 사람일 뿐이다. '피고'가 억울한 상황도 충분히 있다. 어른들 세계에서도 반드시 존재하는 일이다. '법률상'의 잣대가 없이, '부모의 가치관'이라는 '주관적인 잣대'로 내리는 편결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것은 억울한 사람을 더 억울하게 만들 것이다. 그 원망은 '원고'나 '피고'가 아니라, '판결자'에게 간다.

'왜 둘이 싸웠는데 미움받는 대상이 내가 되야 하나'

고로, 아이가 싸우면 그들의 문제로 둬야 한다.

부모는 완전하지 않다. 부모가 아이에 비해 '합리적'인 것은 맞다. 다만 아이의 비해 '합리적'이라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1 더하기 1을 3이라고 하던, 100이라고 하던, 근접한 오류를 들이 밀었다고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의 정답도 오답일 수 있다. 법률을 근거로 세계에서도 상고를 통해 억울함을 덜 수 있는데, 아이에게 그런 일이 없다. 어른이 '판결'을 받아 들일 때는, '처벌'이라고 받는다. 다만 아이에게 '판결'은 '교육'이다.

'판결' 내리는 '중재자' '부모', 역시 부모 노릇이 낯설다. 고로 아이 만큼의 시행착오가 있다. 다시 말해, 초보가 초보를 학습시킨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도찐개찐, 서로가 처음 맞이하는 상황이면서 한쪽이 모르면서 아는 채하는 것. 그것은 때로 독이 된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판결'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교육이다. 세상이 유토피아라고 가르키고 싶지 않다. 세상은 착하면 복을 받고 악하면 벌을 받지 않는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복 받을 일'을 해야 하는 것이고, 벌을 받기 위해서는 '벌 받을 일'을 해야하는 것이다. 복 받는 일과 착한 일은 아주 다른 성격이며, 벌 받는 일과 나쁜 일 또한 다른 일이다. 세상은 선택의 문제다. 누군가는 닭을 잡아먹는 일을 '나쁜일'이라 정의하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나쁜 일'이라고 정의한다. 고로 '나쁜 일'과 '착한 일'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개인의 가치관'의 문제일 뿐이다. KFC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에게 '당신은 소중한 생명의 육신을 뜯어먹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자신만의 '착한 일'을 하는 것이다. 다만 어떤 누군가가 보기에 그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해당되기에 나쁜 일이다. 고로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구별하는 것은 흘러가는 강물을 가르키며 이름 짓는 일만큼 부질없다.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인지 모를 모호한 정체에 이름을 짓는 일이 어떻게 기준선을 가질 수 있겠는가. 고로 명확한 기준선을 던저주기 위해서는 '부모 멋대로의 가치관'이 아닌, 나름의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든든한 배경'이다. 배경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부모의 역할은 고로 그저 존재할 뿐이며 지켜 볼 뿐이다. 다만 환경을 만들어 생존할 방향을 정해주는 일이다. 속에 있는 것을 품고 키워 낼 뿐이다. 아이는 '판단'이 아니라, '지지'를 필요로 한다. 고로 누구의 손을 들어 줄 것이 아니라, '너희가 대화로 해결해'가 답이다. 폭력나 반칙이 들어간다면 거기에서는 중재가 들어간다. 그것은 방관이 아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심판의 역할이다. 권투 경기에서 심판은 매순간 개입하여 싸움을 뜯어 말리지 않는다. 문제가 될 원칙적인 상황에서만 개입한다. 축구에서도 심판은 경기 중 오류를 범했을 때만 개입한다. 심판 자체가 모든 경기를 좌지우지하지 않으며 경기의 승패를 결정해서는 안된다.

'싸움'은 나쁘다라고만 정의 할 수 없다. 싸움은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활동 중 하나'가 싸움이다. 고로 그것은 꽤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회활동'이다. 이런 빈번한 사회활동 조차 가르치지 않고 오롯하게 평화만 강조할 수는 없다. 평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살육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정글로 나가는 아이의 손에 무기 하나 없이 나가게 할 수는 없다. 적절한 싸움의 기술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하며, 때로는 그것이 평화를 만들게 하기도 한다.

인간 사회의 대부분은 '경쟁'과 '싸움'이라는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평화', '사랑', '화합'만 가르쳐야 옳을까. 그럴 수 없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신상아 중 절반은 20대 초반이 되면 어차피 살상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누구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기술이다. 어차피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 사회는 그런 좋은 말로만 굴러가진 않는다. 인간사회와 인간의 본성이 그것이라면 분명 우리는 그것을 학습해야 한다. 그렇다고 남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부모라면 '싸움의 기술'이 자라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언제 싸워야하고, 언제 안되는지 판단 기준을 길려줘야 한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싸움이 벌어진다면, 반드시 '이기도록' '싸움의 기술'도 알려줘야 한다.

나는 아이의 가방을 들어주지 않는다. 팔이 아프다고 하면 눈치를 봐서 땅바닥에 가방을 버려 버린다. 자신이 들지 못할 가방을 들고 나온 후회는 부모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해야 한다. 본인의 가방을 직접 드는 것. 본인의 방을 직접 청소하는 것. 본인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직집 지는 것. 그것은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생존률을 높인다. 스스로 만들어낸 상황에서 필요에 따라 합의를 하고 책임져야 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아이의 이를 뽑았다. 울먹거리는 아이에게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었다. 할아버지께 받은 꼬깃꼬깃 구겨진 4천 원을 지갑에서 꺼냈다. 그것으로 뽑기를 한다. 뽑기 후 나온 것은 목걸이다. 아이에게는 '댓가 없는 돈'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든 돈을 모은다.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여하지 않는다. 돈이 왜 필요한지 스스로 학습해야 한다. 돈의 가치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도 스스로 학습해야 한다. 돈을 위해서 '노동'이 아닌,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려준다.

'이런 것 사느라 돈쓰는 것은 아까워!'

아이에게 '댓가 없는 돈'이 아닌 '보상으로써의 돈'만 준다. '떼를쓰거나 시간을 보내면 저절로 채워지는 풍족'이 아닌, '욕심과 간절함을 불러 일으킬 적당한 결핍'과 철학을 준다.

'케인즈주의', '수정자본주의'는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 할 때 가장 중요한 용어다.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아예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으면 '공황'을 만들어내고, 무조건적인 개입은 '독재'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황'은 쉽게 무너져 내리고, '독재'는 성장을 저해한다. 고로 적당한 개입과 적당한 방임이 중요하다. 아이의 앞에서 함께 책을 읽는 일, 아이와 도서관이나 서점을 가는 일, 아이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책을 함께 나눠 읽는 일. 그것을 아이의 배경 설정해두고 방임한다. 원래 자연계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평화'가 아니라 '사냥법'을 가르친다.

IMG_4461.jpg?type=w580
IMG_5031.jpg?type=w580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인문] 자녀가 수학을 제대로 공부하는지 확인하는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