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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우월한 유전자만 살린다?_악의 유전학

by 오인환

우생학하면 꽤 전근대적 용어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최근 중국의 허젠쿠이라는 과학자는 특별한 실험을 했다. 그는 에이즈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HIV 바이러스에 아이들이 감염되지 않도록 실험을 했다. 아이들의 DNA를 바꾸어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아이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 실험은 전 세계에서 크게 논란이 됐고 허젠쿠이는 이후 법적 처벌을 받는다.

비슷한 예는 더 있다. 1996년 일본에서는 '우생보호법'을 폐지했다. 이 법은 우생학적 이념에 기반을 둔 법이다. 쉽게 말해 특정 유전 질환을 가진 사람들 혹은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출산을 강제로 제한하는 법이다. 이 법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당사자 동의없이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동아시아'의 생명 윤리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20세기 중반까지 비슷한 사례가 법적으로 허용됐다. 미국의 여러 주에서도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수술을 허용했다. 이후 이런 법적 조치들은 대부분 폐지 됐지만 일부 주에서는 여전히 관련 법이 존재한다. 또한 최근까지 실제 실시된 사례가 보고되기도 한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흔히 '복지의 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에서도 우생학 프로그램이 있었다. 스웨덴은 비교적 최근인 1976년까지 우생학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이들과 사회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시행했다. '생명 윤리'는 '우생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문제 제기 된다. 인도는 1970년대에 인구 조절을 위해 대규모 강제 불임 수술 캠페인을 벌였다. 인구를 줄이기 위해 많은 인도 남성들은 실제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 1972년까지 미국에서는 수 십 년 동안 매독에 걸린 남성을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흑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 했으며 나치 독일 또한 앞서 말한 다양한 종류의 실험을 자행했다.

얼핏 우생학은 그럴싸 해보인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 논리는 아주 쉽고 단순하다. 특정 유전자가 좋은 특성을 결정한다. 고로 나쁜 유전자를 없애고 좋은 유전자를 남기면 전반적으로 사회에는 좋은 유전자만 남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유전학 실험하면 인간의 건강과 능력을 개선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다. 쉽게 말해, 뛰어난 유전자만 사회에 남기고 열등한 유전자를 없애는 일이다. 고로 과거에는 꽤 많은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우생학을 지지했다. 실제 조선에서도 우생학의 역사는 존재한다. 1973년 12월 5일, 대한민국 초대 보건부 차관인 '이갑수'라는 이가 사망한다. 그는 1889년 4월에 태어난다. 경성의학전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유학 후, 1933년 조선 우생학회 창립의 주도적인 인물로 활동한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 국립 우생학회를 재건하여 우생법 재건을 위해 노력한다. 어쨌건 현대 사회가 되면서 윤리와 인권 등의 문제가 되기 전, 당시에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생학은 어째서 잘못됐을까. 이유는 이렇다. 우생은 기본적으로 '철학'의 문제와 엮인다. 과연 좋은 유전자라고 하는 것을 누가 정의할 것인가. '좋다'라는 것은 또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목이 긴 기린이 '자연의 선택'을 받아 생존한 것은 '환경'에 적합한 유전자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변화무쌍한 환경에 적합한 유전인자를 어떻게 구별할 것이냐는 것이다. 지구는 몇 번의 대멸종기를 맞이한다. 지구의 대멸종 사건은 '탄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탄소 순환의 변화가 지구 기후와 대기, 해양의 화학 구성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공기 중에 '산소농도'가 변화한다. 여기에 적합한 생물종이 살아 남았기 때문에 모든 공룡이 일시에 멸종한 이후에도 '포유류' 같은 작은 종이 생존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종의 번영을 위해서는 '종의 다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무지'가 '정치'와 만나면 역사는 어떻게 잔인해지는지 우리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불과 50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농업사회'를 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얼마 뒤에 '산업사회'를 산다. 시대마다 요구하는 '좋은 유전자'는 다르다. 우리가 제거한 유전인자가 어떤 시대에 어떻게 발현될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유전적 실험은 대체로 성공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더 많은 우유를 공급하던 '소'는 '우유'를 공급하는 일 밖에 하지 못한다. 불균형적으로 무너진 신체는 다른 상황에서 생존하기 힘들게 됐다. 인간에게 보살핌과 귀여움을 받아야 생존하던 늑대와 여우는 알록달록한 외형을 가진 대신에 자연에서 생존할 수 있는 대부분의 능력을 상실했다. 과연 이것에 올바른 방향으로의 생존인지를 따지고 보자면 우리는 자연이 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 편이 훨씬 현명한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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