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토브리그'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돈이 없어서 졌다. 과외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갔다. 몸이 아파서 졌다. 모두가 같은 환경일 수가 없고, 각자 가진 무기 가지고 싸우는 건데, 핑계대기 시작하면 똑같은 상황에서 또 집니다. 우리는 오서환 단장한테 진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주어진 상황한테 진 겁니다."
운동 선수가 경기에서 졌으면 경쟁 상대를 미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는 누가됐건 이길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본질은 지지 않는 것이지, 상대가 어쩐지가 아니다. 공정한 룰과 규칙에 의해 진행되는 '스포츠'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이성적 대응이다. 상대를 미워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냉철하게 확인하고 합리적, 이성적으로 상황을 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적'은 언제나 '적'이 아니다. '비'는 '홍수'가 났을 때나 '원망'의 대상이지, 가문 날에는 '희망'의 대상이다. 고로 대응은 '상대'가 아니라 '상황'에 해야 한다.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언제나 '명분'만을 가지고 대응할 수는 없다.
명청교체기에 '여진족'과 화친해야 하는 문제로 조선은 분열되어 있었다. 당시 '여진'은 오랑케였다. 그냥 오랑케도 아니라, 뿌리 깊은 숙적이다. 여진족은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 때에도 한반도 내륙과 해안 지역을 침입하고 약탈하곤 했다. '광해'의 실리외교가 당시에는 '친일'에 버금가는 저항을 불러 일으켰음을 짐작케 할 수 있다. 결코 '적'과 화친할 수 없는 명분은 '인조반정'의 원인이 됐다. 기어코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한 '선택'이 결국, 비극이 됐다.
중요한 것은 학습능력이다. 변형 문제가 나오면 와르르 무너지는 겉핥기식 학습이 아니라, 그 '본질'을 파고 드는 일이다. 산과 골이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시간'과 '상황'의 변화는 '새옹지마'와 닮았다. 모든 것은 그렇게 위와 아래를 번가른다. 그리고 나아간다. 중간단계 없이 건너뛰는 것은 없다. 하루와 하루가 쌓여 이뤄지는 것이다. 바퀴가 땅을 밟고 일렬의 흔적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가듯, 모든 과정을 하나의 선으로 즈려밟고 나아가는 것이다. 고로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없고,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도 없다. 그래서 고대 인도는 '수레바퀴'에 빗대어 우주를 표현했는지 모른다. 경제는 매초, 매분, 매일, 매주, 매년을 숫자하여 기록한다. 수레바퀴가 굴러간 흔적이 여실하게 좌표에 나온다. 그것이 가능한 영역이기에 그렇다. 사람의 일생도 수치화 가능하다면 '분봉', '일봉', '주봉', '월봉'처럼 캔들차트화 가능할지 모른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우리는 모두 '우상향'을 바란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급상승하는 그래프가 언제나 우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고로 '역사', '경제', '사회', '문화' 무엇을 보거나 단기적인 파동에 눈이 가려져 더 큰 파동을 보지 못한다면 그 수레 바퀴는 '위'를 향한 우상향이 아니라, 때로는 제자리를 헛도는, 혹은 '바닥'을 향해 나아가는 '우하향'이 되지 않을까. 간혹 역사, 국제관계, 경제 등을 보며 스스로에 대한 삶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