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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어른이 더 필요한 성교육_어색하고 불편하지만,

by 오인환

진화적으로 보면 원래 원숭이는 사족보행했다. 이는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다. 고대 유인원의 서식지는 숲이었다. 고로 나무가 많은 지역에서 나무 위 생활을 하던 원숭이는 환경이 급작스럽게 변하면서 나무에서 내려와야 했다.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지역을 위해 이동해야 했다. 그 결과, 원숭이 중 척추가 곧고 이족보행이 가능한 돌연변이들의 생존가능성이 더 높았다. 생존한 종들이 세대를 거치면서 인류는 점차 이족보행을 하게 된다. 척추가 곧게 펴졌다. 오래 걷기 위해 '털'은 얇고 짧아졌다. 이런 털없는 원숭이는 기존 원숭이와 아주 확연하게 다른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성기 노출'이다. 이는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은 '데즈먼드 모리스'의 대표작 '털없는 원숭이'에 나오는 동물학적 인간론이다. 직립보행으로 인해 인간 성기에 일어난 변화는 주로 남성의 성기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인간 남성의 성기는 다른 대형 유인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고 뚜렷한 형태를 가지는데, 그로인해 번식과 인구의 증가가 뚜렷해진다는 가설이 있다. 초기 인류에게 '번식'은 꽤 커다란 리스크를 갖는 일이다. 인간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바로 걷기 시작하는 다른 포유류와는 다르게 종일 울기만하고 먹기만 한다. 또한 어두운 밤, '포식자'에게 위험을 노출하는 일이고 여성의 노동력을 무한대로 소비시킨다. 고로 인간의 성행동은 복잡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됐다. 이어 옷을 만들어 입고 중요부위를 가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필수 생존전력과 닮았다. '성'이 '사회적 수치심'이라는 것은 동서양 할 것 없이 꽤 보편적이다. 초기 인류에게 '성'은 '위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성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책임'을 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난자와 정자가 어떻게 만나는지, 아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공부하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자연계에서는 '난자'와 '정자'의 개념은 물론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지 못하는 모든 생명체가 있다. 그것을 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다면 '성교육'은 그저 지적 호기심의 영역의 일부분일 뿐이다. 앞서 말한대로, 초기 인류에게 '성'은 '위험'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을 가만할 책임을 질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고로 무분별한 번식은 '사회 전체'에 '악'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현대 우리 사회라고 다르지 않다. 사회가 복잡해 질수록 '성'에 대해 숨긴다. 가령 아프리카의 다양한 국가들은 여성의 첫 결혼 연령이 20살이다. 중앙 아프리카의 차드 또한 결혼 평균 연령은 19세로 매우 낮다. 19세기 한국의 결혼 평균 연령도 여성이 17.5세, 남성이 17.9세로 매우 낮았다. 21세기 오늘날 한국의 평균연령은 33.2세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이는 아이 가지는 것이 사회가 복잡할수록 '위험'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교육은 물론 중요하다. 다만 그것은 단순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연령대에 걸쳐 필요한 교육이다. 그것의 책임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해야 한다.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의 성지식'을 걱정하지만 따지고보면, 어른들의 '성지식'도 그닥 훌륭하지 못하다. 그런 어른이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성'에 대해는 아주 학문적인 지식까지는 필요치 않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은 '성교육' 없이 자라고 번식한다. 인간계에 그런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앞서말한, '성'에 의해 발생하는 제도와 법률, 윤리적 문제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모르고, 여성이 남성에 대해 모르는 것은 '자연 질서'에서 당연하다. 인간 사회는 자연과 다르게 이성이 섞이고 다양한 구조의 조직도 만들어 낸다. 뿐만 아니라, 각 나이마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사회의 자리가 있다. 자연계에는 없는 윤리적, 사회적 질서도 있다. 그것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 적당한 규제다. 아이들의 성은 나쁘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른에게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 사회의 출산률이 낮은 이유도 비슷한 이유다. 책임지지 못할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고대 시대에 인류에게 있던 심리적 위협이 사회가 복잡해진 현대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날씨 문제로 실내에서 체육활동을 한 적 있다. 당시 선생님은 갓 장가를 갔던 젊은 남선생님이셨다. 수업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에 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체육'에 관한 혹은 신변잡기적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한창 진행하다가 학생 중 한명이 '성'에 관한 농담을 했다. 남자 선생님은 갑자기 수업을 멈추고 말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네."

갑자기 수업은 '성교육 시간'으로 바뀌었다. 수업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성인이 된 지금 돌이켜 보건데, 위험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이야기였다. 당시 선생님은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칠판에 그려놓고 그 구조를 설명했다.

'이곳은 이렇고, 저곳은 저렇다'

앞뒤 상황에 전혀 기억에 나질 않는데, '딱' 그 부분만 기억에 선명하게 난다. 아마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남들보다 사춘기가 늦게 왔다. 얼마나 무지했던지 마치 '에어로졸'처럼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서 잠만 자더라도 공기를 통해 '아이'가 덜컥 생겨나는 줄 알던 시기다. 그때도 '가정'이라는 과목이 있었고, 교과과목에는 '성교육'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교육'의 이름으로 포장된 '성'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같이 '성'은 현실이 아닌 어딘가에 있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성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선생님들은 얼마 뒤 '시청각 자료'를 들고 왔다. 남 선생님이 수업은 '위험한 선'에 근접했고, 여 선생님의 수업은 '선'에 근접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민감한 질문에는 둘러 표현하기 급급했다. 어른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더 즐기는 듯 보였다.

성에 대해 다양한 생각이 존재한다. 물론 부모로써 아이에게 쉬쉬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다만 불필요한 간섭 또한 필요치 않다. 부모가 아이를 꽤 늦은 나이까지 끼고 사는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불협화음일 뿐, 원래 성에 대해 인지를 할 때부터, 자연계는 성인이다. 어느 포유류도 자녀에게 성교육을 시키진 않는다. 성은 그 나이에 맞춰 본능적으로 알아가게 되어 있다. 다만 앞서 말한대로, 거기에 따른 책임과 역할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성교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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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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