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게 MBTI에 꽂혀 있다. 남들은 이미 관심이 시들해진 이들도 있지만 요즘 한참 심취해 있을 때가 있다. 별자리나 혈액형별 성격유형, 이런 류의 것을 잘 믿지는 않지만 어쩐지 MBTI는 사람을 파악하기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검사를 하면 딱 두 유형이 나온다. INFJ, INTJ. 이 두 유형은 번갈아가며 나온다.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나오곤 한다. 실제로 이 두 유형의 성격을 모두 내가 갖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읽는 책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철학'이나 '종교', '사회', '에세이', '시'와 같은 글을 심취해 읽을 때는 감성적으로 변했다가, '과학', '추리', '인문학'을 읽으면 이성적으로 변한다. 어떻게 70억의 인구를 모두 16개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어떻게 100년의 삶 중 일부만 떼어다가 그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남이 아닌 자신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누군가와 함께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최근 겪었는지와 무관하게 일관적일 수 있겠는가. 그런 물음을 갖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정도 나를 남에게 소개하는데 간편한 방식은 맞다는 것이다. 장황하게 MBTI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책을 선정하는 기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을 매우 좋아한다. 이것이 INTJ가 좋아하는 도서라는 글을 보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분명 그러하긴 하지만, 나는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감성적인 글을 좋아하기도 한다. 고로 나는 INFJ와 INTJ 유형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는 아무개라고 보여진다.
지난 이틀은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쏟아지다가 맑게 개이기를 반복한다. 하늘을 보아도 구름은 희다가, 검다가를 층층이 쌓고 있다. 회색층 없이 층층이 쌓인 하늘에 따라 눈은 내리다가, 그러지 않다가를 반복한다. 날이 싸늘하게 추운데, 가장 좋아하는 가수 '성시경'의 음악을 틀고 '헤이즐넛 커피'를 내린다. 커피가 내려가면 안락 소파에 앉아 책을 잡는다. 꽤 감성에 젖어 그럴싸하게 폼잡고 커피와 책을 들고 마신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 자세는 완전 엉망이다. 무거운 머리는 대충 삐딱하니 두고 다리 한 쪽은 의자 밖으로 꺼내어 꼼질 꼼질 거린다. 그러다 지나가는 아이의 머리에 발을 콩콩 찧는다. 아이가 덤벼들만 한참을 놀다가 다시 책에 집중한다. 어제 오늘 읽은 책은 '규슈의 실종자들'이다. 소설은 꽤 가볍다. 쉽게 말하면 인물의 성격도 평면적이고 서사도 단순하다. 고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주제는 흥미롭다. 갑자기 사라진 이들에게 오는 분홍색 편지. 그 편지의 발신이가 이미 죽은 이라는 설정이다. 최근 읽었던 '러브레터'나 드라마 '더 글로리'를 닮았다. 배경은 '일본'이다. 등장인물은 '일본'과 '한국'의 중간 쯤 되는 재일교포다.
소설의 내용과 별개로, 중간의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조예가 깊다. 앞서 말한대로 나는 INFJ와 INTJ의 중간 쯤 되는 인간이다. 불경에서 철학적 사유를 깨닫고 성경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길 즐긴다. 그렇다고 신을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성별은 남성이지만 보통의 남자와 대화 주제가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느낀다. 해외에서 외국인도, 현지인도, 그렇다고 영주권자도 아닌 모호한 지위로 10년이나 살았다. 한국을 잘 모르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한국에 대해 잘 아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안다. 영어를 잘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고, 영어를 못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 그런 모호함이 결국 나의 명확한 정체성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소설에 등장 인물 일부는 '일본 이름'이다. 일본 추리를 좋아하는 편이라, 거부감 없고 오히려 집중이 된다. 이 소설이 조금 각별하게 읽혀지는 이유는 '작가소개'에 있다. 한고운 작가는 이 작품이 첫 작품이다. 일본 여행에서 이 소설을 쓰고자 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설은 읽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오탈자가 보인다. 인간적인 습작의 흔적이다. 2년이 넘도록 묵혀 놓은 '소설'이 한 편있다. 그 전에 10년이 넘도록 묵혀 놓은 작품도 있다. 다만 나의 글은 출간하지 못했다. 이유라면 글이 조금 어려워진 탓일 것이다. 어려운 글은 때로 좋은 글처럼 보여지지만 좋은 글은 쉬운 글이다. 고로 이미 써내려간 글을 어떻게 쉽게 바꿔야 하나가 나의 숙제다. 개인적으로 '소설 출간'에 동경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나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작가의 글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 사람들은 어떤 노래를 들으면 잠깐을 듣고도 '누구의 노래'인지 알아 맞힌다. 김훈 작가의 글처럼 담백한 글 종류라면 몇 문장을 읽고도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이고'나 '하루키' 또한 자신만의 명확한 색채를 가진 작가다. 책을 고를 때, 단순히 '작가'만 보고 고른다는 것은 꽤 징명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이를 찾았다는 의미다.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동경하게 되는 것은 독자로써도 뿌듯함이 생기는 일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가 숨겼던, 그렇지 않던 의미있는 바를 찾을 수 있다. 정의로운 가면 뒤에 있는 과거, 누군가를 뒷바라지 하기 위해 선택했던 어떤 잘못, 그 위로 쌓여지는 진짜와 가짜의 겹겹이 때로는 눈을 뿌리고 때로는 햇살을 내리는 오늘의 날을 닮은 것 같다. 소설은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추리를 좋아하는 이들이게 가벼운 '스낵' 같은 글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