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모차르트는? 아인슈타인은? 에디슨은?
아마 천재 혹은 비범한 사람의 대명사로 분류될지 모른다. 그럼 이제 이들이 얼마나 많은 흔적을 남겼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아마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알게 되는 몇 가지 대표 업적만으로 그를 평가하지 얼마나 그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 알지 못한다.
피카소는 평생 2만점의 예술 작품을 창작했다. 모차르트는 짧은 생애인 35년 간 600개의 작품을 작곡했으며 아인슈타인의 과학논문은 240편이나 된다. 에디슨은 혁신의 아이콘처럼 그려지지만 1000개의 특허를 냈다. 핸리포드도 마찬가지다. 핸리포드는 생애동안 161개의 특허를 얻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총 30개 이상의 영화를 감독했다. 클로드 모네는 생애 동안 2500점의 그림을 그린다. 이들에게도 성공 확률은 100중 1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지만, 우리는 에디슨의 발명품은 10개를 댈 수 없고, 피카소의 작품 100개를 기억할 수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위대하지만 그가 연출한 작품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다. 범인인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하고 있는가.
그렇다. 시행횟수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천재로 추앙 받는 이들도 이처럼 다작한다. 많은 시도를 하고 실패를 한다. 그러나 범인이라는 우리는 천재를 추앙하면서 몇 번의 시도만으로 성공을 희망한다. 과연 얼마나 오만한가.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범인이라 말하면서, 천재라 믿고 있는 오만함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회적 성공이나 경제적 성취뿐만 아니다. 우리의 삶을 채우는 많은 현상들은 '시행횟수'에 따라 기회가 특정 확률로 주어진다. 취업 면접, 스포츠 연습, 학습과, 시험, 비즈니스와 창업, 예술 창작 등.
이것은 단순히 돈버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성공 확률'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은 '확률'로 존재한다. 그것은 양자역학도 그렇다 말한다. 다시 말해보자. 모든 것은 확률로 존재한다. 지금 당장 편의점으로 뛰어가서 로또 복권을 구매하면 그것이 당첨될 확률은 814만 분의 1이다. 길을 가는 사람을 잡고 '잠시 저의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개중 '알겠습니다'라고 답할 사람의 확률도 숫자로 존재한다. 시행을 한다면 0이라는 것은 없다. 0이라는 것은 오로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만 존재한다. 고로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최소 0.1%의 확률이라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수학에서는 '큰수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는 고등 수학의 '확률과 통계학'에 나오는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어떤 사건을 충분히 반복하면 그 결과는 그 사건이 일어날 이론적 확률에 무수하게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확률은 50%다. 몇 번을 던졌을 때는 그 확률은 다를 수 있다. 가령 10번을 던지면 7번이 앞면, 3번이 뒷면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시행 횟수를 천 번, 만 번 던지게 되면 대략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같아진다. 즉 다시 말하면 시행횟수가 많으면 그 확률에 비례하여 반드시 원하는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성공확률이 1%인 경우 100번의 시행 횟수를 가지면 성공 확률은 100에 수렴한다. 0.1%의 확률인 경우, 1000번의 시행횟수를 가지면 성공 확률은 역시 100에 수렴한다. 확률을 바꿀 수 없는 게임에서 유일하게 그 게임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것은 '시행횟수'다.
세상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확률'을 바꾸는 것을 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의 시행 횟수를 늘리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운'에 의해 성패가 결정되는 일인 경우가 그렇다. 다만 세상만사는 모두 '운'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은 아니다. 세상에는 '노력'에 의해 결정되는 일도 무수하게 많다. 그렇다면 노력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노력'의 수치를 높이는 일은 이렇다. '시행횟수'를 높이는 일이다. 다시말해 '시행횟수'를 높이는 일은 어떤 일에서도 반드시 중요하다. 이런 미련하고 바보같은 일은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과 닮았다. 우리가 때로는 경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인공지능'은 생각보다 '미련하고 무식한 수준'의 시행횟수를 가진다.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첫째, 대응한다. 둘째, '그렇다'와 '아니다'를 구분한다. 셋째, '아니다'인 경우, 다시 대응한다. 그리고 '그렇다'와 '아니다'로 구분한다. 이것을 무한에 가깝게 시행하며 하나의 표본값을 구하는 일이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시행'하는 일이며,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다시 시행하는 것'이다. 그 뿐이다. 그것이 인공지능이 정답에 수렴하는 대답을 내어 놓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이 '신'이 숨겨 놓은 유일한 '기회'를 찾아내는 일이다.
이렇게 쉬운 일에 우리는 때로 지나친 '감정이입'을 한다. 즉 어떤 일에 대해 '실패'를 했을 때, 단순히 '다시하면 된다'라는 옵션을 우리는 선택하지 못한다. 때로 그것은 경제적인 이유일 수도 있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심리적인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편향'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건보다 부정적인 사건에 더 강하게 반응하고 오래 기억하는 성향을 가진다. 대부분의 주식투자자가 겪는 투자 손실은 이런 심리적인 이유로 발생하기도 한다. 투자자는 요동치는 투자 차트에서 내려가는 차트에 더 큰 반응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시행횟수. 그리고 그것을 감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패에 담담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원대한 꿈'을 매일 같이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뉴질랜드 등반가인 에드먼드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최초로 오른 사람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토록 높은 산을 오를 수 있었습니까?'
이에 그는 답한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올랐다."
유격 훈련이 끝난 뒤, 돌아가는 유격 행군에서 나는 그 거리가 그렇게 멀었다만 아마 중간 정도쯤 좌절 했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그 고된 훈련을 마치고도 행군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이 다음 고개까지만 가자'와 '아무런 감정없는 앞 녀석의 군화발' 때문이다. 그냥 한걸음을 걷고, 그냥 다음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고로 열심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냥하는 것이다. 그냥하는 것은 어찌됐건, 하게 한다. 하나의 시행횟수를 더 높이며, 실패시에 심리적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 데미지 입지 않은 심리는 다음 시행을 하도록 독려한다. 그렇게 다음 시행이 이뤄지고 다시 실패하고 다시 실행하는 과정에서, 내가 성공에 닿을 가능성은 100에 수렴한다. 모든 비범은 수많은 평범 위에 쌓여진 결과다. 다시 말하면 모든 평범은 비범의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