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념' 그 자체가 아니라, 신념을 선택하는 존재일 뿐이다. 신념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선택할 수 있다. 고로 오래된 신념에 묻혀, 그것이 자아 그 자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신념은 우리를 가둘 수 있다. 어떤 신념은 우리를 주저 앉히고 어떤 신념은 우리를 나가게 한다. 과거의 신념이 꼭 그르지도 않지만, 꼭 옳지도 않다. 그것인 변화하는 시계 바늘처럼 어떤 때에는 꼭 맞다가 어떤 때가 되면 반드시 달라진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시간에 맞게 움직이는 일이다. 아침이 되면 아침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저녁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아침이 되어, 저녁의 일을 하고 저녁이 되어 아침의 일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일관적인 어떤 것은 어떤 시기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은 변화무쌍한 우주의 생태에 따라 반드시 오류를 범한다. 세상만사는 모두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것은 연결된다. 고로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태양이 은하 중심을 돌고 은하가 우주의 중심을 돌고 있는 만물이 움직이는 역학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바뀌게 되어 있다. 우주 역학을 무시한 채, 변하지 않는 신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신의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일지 모른다. 신념은 고로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움직여진다.
나를 움직여 온 어떤 동력이 때르는 제동력의 원인이 되고, 나를 멈추게 했던 제동력이 다른 이유로 동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를 달리게 만들었던 동력의 힘이 거기서 다한다면, 나를 움직일 새로운 동력원을 찾아 언제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가 쌓은 신념 위의 세계가 동력을 다하고 멈춰 있는 순간, 우리는 가만히 그 동력이작동 될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새로운 동력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세계, 그 세계 밖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장한다. 알은 세계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때가 되면 빈방에는 치즈가 채워진다. 그 불확실한 확신의 아래에 거짓된 신념을 갖는다. 그것이 깨어지기 전까지 그것은 '진리'이며 곧 '세계'가 된다. 세계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비록 신념을 깨어버리면, 세상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아도, 깨어진 신념 밖으로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어떤 경우에는 삶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일을 겪어도, 삶은 무너지지 않고 천지가 개벽할 것 같은 경험을 해도 천지는 개벽하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일상과 세계가 펼쳐지며, 새로운 보통이, 기존 보통을 대체하는 '뉴노멀의 시대'가 시작할 뿐이다. 누군가는 퇴사한 이후의 삶을 상상치 못하고, 누군가는 마스크로 사람의 코와 입을 막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으며, 누군가는 거대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공하는 세상을 상상치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현실'은 언제든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이 일어나고 나면 그것은 곧바로, '현실'의 영역에서 새로운 '현실'이 된다.
사람은 진리에 따라 행동의 영향을 받는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진실이며, 그것은객관적인 무언가처럼 보이지만, 변화무쌍함이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맞는 진리를 갖는다. 태양이 돌고 지구가 돌고 은하계가 돌고 있는 와중에 혼자서 멈춰 있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전속력으로 세상의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던 얇은 막 안으로 세상을 그린다. 보호 받고 존재의 이유를 가늠한다. 반대로 '알'에 의해 고립되고, 가로 막힌다. 우리를 보호하는 어떤 것은 때로는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이 외부에서 깨어지면 세상이 무너지지만, 내부에서 깨어버리면 성장으로 거듭난다. 사실이라고 믿던 신념은 조현병 환자가 환영과 환청을 닮았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완벽한 논리가 무너지지 않으면 병은 치료되지 않는다. 충분하게 관리할 수 있는 조현 증세가 만성적이고 불치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이유는 환자 스스로 그것을 '병'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갇혀 환상과 착각으로 세상을 창조하는데, 그 벽이 워낙 공고해서 남편과 부모, 자식, 심지어 의사의 말도 모두 거짓으로 받아들인다. 세계가 공고해 질수록 병은 깊어지며 병이 깊어지면 새로운 세계는 멀어진다.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 중 하나를 집어 삼키는 일은 두려움과 호기심의 영역을 넘어 완전히 또다른 진실을 아는 일이다. 어떤 쪽을 집어 삼키듯 그 둘은 모두 진실로 남는다. 우리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빨간 약을 삼킨 이도, 파란 약을 삼킨 이도 모두 자신의 진리 속 세상을 경험한다.
어둡고 텅빈 방안에 우리를 가두고 있던 신념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의 모험을 하락하게 하기 위해선 고로 자신의 자아와 세계를 완전히 무너트려야 하며 단 하나의 신념만이 자리하고 있는 삶에서 벗어는 것이 중요하다. 믿는 것은 세계를 좁게 만든다. 고로 믿음은 때로는 약이며 때로는 독이다. 어떤 면에서 '의심'은 독이고 다시 어떤 면에서 '약'이 된다. 오랜 신념 아래서 끓는 물의 개구리처럼 우리를 삶아지게 만드는 것은 확고한 신념과 믿음일지 모른다. 끊임없는 의심. 자신의 세계가 진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호기심. 나를 이끌어온 동력이 제동력일 수 있다는 의구심. 이런 것들이 진정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새로운 삶은 좋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선택의 영역이며 이 후에는 받아들임의 영역이다. 고로 열어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외벽을 박차고 나아가던, 시기와 때를 기다리며 현실의 세계에 충실하던 그것은 모두 '신념'의 영역이며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