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붕어의 기억력은 3초라고 하지만, 실제 금붕어의 기억력은 몇 달이 넘는다. 이들 역시 학습력도 가지고 있다. 금붕어는 시각과 청각을 통해 시간을 인지하고 공간과 방향 인지 능력도 있다. '금붕어 3초 기억력'에 대한 설은 고로 거짓이다. 그렇다고 그 기억력이 꽤 길다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10에서 15년 정도를 사는데, 이는 집고양이의 수명과 비슷하다. 평생 수명에 비해서 이들의 기억력은 불과 몇달이 고작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몇달 이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어린 시절, 대략 대여섯 쯤, 부모님과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에 '나'는 어떤 어떤 동상 위에 앉혀져 있었고 울고 있었다. 그 사진에 대한 서사를 '어머니, 아버지'는 읊어주셨다. 어느 곳에 동창회 모임으로 여행을 갔고, 거기서 장난을 치느라, 나를 혼자 두고 숨었다가 나타나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노라면, 마치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른 이'의 과거라고 해도 믿음직했다. 나에게는 그에 관한 단 하나의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나의 어린 시절은 부모님의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무존재'와 닮았다. 나의 무의식이 어떻게 그 장면을 기억하느냐에 상관없이, 나에게 그 일은 있어 본 적 없는 '픽션'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나에게 일어난 일일까. 부모님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왜곡 된다면, 나의 과거는 어떻게 바뀌는 것일까. 고로 '시간'이란 '허상'과 같다.
시간은 경험하고 기억하는 사건들의 순차적 정렬일 뿐이다. 과거 맹장이 터져 수술했던 기억이 있다. 땀 흘리며 땅을 굴렀다. 아팠다는 기억과 그 중간 중간의 기억상실, 다시 어느 순간 나의 기억은 수술대 위에 있었다.
"자, 마취제 들어갑니다. 숫자를 열 부터 거꾸로 세어 보세요."
그 치명적인 고통 속에서 유치한 호기심이 들었다. 혹시 '마취제'에 의한 '마취'를 정신력으로 견뎌 볼 수 있지 않을까.
"열, 아홉.'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미 수술은 끝난지 꽤 지나 있었다. 꿈을 꾼 적은 없다. 그저 기억과 기억 사이에 기억 상실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검은 바탕과 무존재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저 잘 잘라낸 편집점처럼 수 시간이 들어내어져 있었다. 그 기간, 나는 살아있던가. 알 수 없다.
만 스물, 해외에서 '마케팅'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루 일과는 공부보다 '노동'이 많았다. 술을 마시는 '클럽'에서는 저녁 9시에서 아침 9시까지 일했다. 쉬는 시간 없이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클럽'에서 울리는 커다란 비트 때문이었다. '쿵쿵' 때리는 비트는 '고막'이 아니라, 온몸에 전달됐다. 심장 박동보다 빠르게 외부에서 때르는 베이스는 정신적 트랜스 상태에 빠지도록 했다. 졸리지도 않았고 배고프지도 않았다. 완전한 '각성 상태'에서 12시간을 마치고 나면, 그 근처 아파트 청소를 했다. 땀 냄새, 알코올 냄새, 담배 냄새가 피부 기름에 섞여 불쾌한 악취를 만들었으나 그 청소까지 해야 집 렌트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2시간을 더 일하고 오후 1시에 가까운 시간에 학교를 가야 했다. 집으로 돌아갔다.
오후 12시 따뜻한 물에 더러운 기름과 냄새를 벗겨내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날은 바로 시험 전날 이었다. 1시 반 수업까지 한 시간 가량 남았다. 자리에 앉아서 시계를 봤다. 잠을 자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시험 공부 30분만 하고 학교에 가자, 지금 시간이 12시 10분이니까. 40분에 출발하자."
책을 들여다 봤다.
'12시 10분'
바로
'1시 30분'
눈을 비볐다. 분명 잔 기억이 없다. 나는 분명 시계를 봤고, 책장에 고개를 내렸다가 다시 시계를 봤다. 1시간 20분이나 지나 있었다. 이 기억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던지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뜬 기억도 없다. 12시 10분, 다시 1시 30분.
이런 시간의 흐름이 어쩌면 세상이 만들어낸 '시스템 오류'는 아닐까', 시계가 잘못됐을가.
나는 바로 학교로 달려갔고, 10분 늦은 이유로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시간'은 그렇다. 시간은 뒤로는 '기억력'에 의존할뿐이고, 앞으로는 '상상력'에 의존할 뿐이다. 기억력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열어보기 전까지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상상력은 왜곡 이전에, 망상 자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열어보기 전까지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모든 존재는 지금과 여기만 있을 뿐이다. 지금과 여기는 기억 바라보고, 상상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능동적인 위치다. 고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뒤로의 세계를 창조하고 앞으로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바라보는 자'가 아닌가. 시간마저 이처럼 '의미부여'의 영역에 존재한다. 시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사건과 세계도 이런 의미 부여의 영역에 환상과 같이 존재한다. 바라보기 전까지 모든 것은 파동으로 있다가, 바라보는 순간 입자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세상을 창조하고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그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중요하다. 거기에는 모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때로는 좋은 의미, 때로는 나쁜 의미. 그 의미가 나에게 다시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다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고로 모든 '해석자'는 전지전능하며 모든 가능성을 행 할 수 있는 능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