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어회'는 가장 좋아하는 회 중 하나다. '광어'는 스스로 회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저 '식품'처럼 보여지는 경우가 있다. 그 외형이 그저 손질되기 편하기 위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잔인한 인식의 오류다. 광어의 표면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식탁에 올라가기 때문에, 그것의 원래 색에 대해서는 자세히 볼 기회는 많지 않지만, 광어의 표면이 모래를 닮았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광어의 표면은 왜 모래를 닮았나. 그것은 인간의 식욕을 자극하기 위한 '데코레이션'이 아니다. 광어 또한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에 의해 최선의 진화를 한 결과물이다. 광어는 대략 5천만 년 간 진화를 거듭해 온 종이다. 고로 고작해봐야 30만 년의 진화의 단계를 거쳐 온 사피엔스에 비하면 조금더 자연선택의 최전선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5천만년 동안 아주 섬세하게 진화해 왔다. 그놈이 그놈인 자연 생태계에서 우연하게 모래와 닮은 놈이 포식자에게 덜 잡혀먹혔다. 다시 살아남은 놈들 중 더 모래와 닮은 돌연변이가 포식자에게 덜 잡아먹힌다. 이런 세대 간의 반복이 거듭되면서 더 '모래' 같은 녀석만 남았다. 이 과정이 5천만 년이니, 그 위장술은 가히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바다 깊은 곳에서 바닥에 바짝 엎드려 모래와 자갈을 닮은 모양을 하던 이들은 간혹 이 진화의 오류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위장은 워낙 완벽 단계에 머물러 있어, 심지어 같은 종끼리의 소통도 어려워진다. 다시말해 짝짓기 시즌이 되면 이들은 모래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바닥을 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넓은 바다에 존재하는 것은 '나 하나뿐이구나. 스스로의 등껍질 위에 완벽한 모래의 형상을 쌓고 다른 이들의 위장에 깜빡 속는 것이다. 우리 사회라고 별거 있나. 현대 인간 사회도 이와 유사하다. 인간은 위장술이 부족한 '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만 보면 우리 또한 '자연선택'에 따라 '최선의 위장술'을 선물 받았다.
'당신의 눈동자'가 그렇다. 우리는 홀로 살아남기 어려운 '영장목'에 속한다. '침팬지'나 '카푸친 원숭이'도 같은 소속에 있다. 이들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없이 얇고 가벼운 피부만 가지고 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사회화'라는 사회적 진화를 필수적으로 가져야 했다. 즉 다른 이들에게 선택 받아야 했다.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몹시 중요하다. 당신이 어디를 보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대에게 알려주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을 구성원에 합류시켰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이들은 사회화에서 떨어져 생존확률이 줄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진화는 양면을 가졌다. 남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의 약점을 숨겨야 했다. 즉, 우리는 이성을 고를 때, '얼굴'과 같은 외형을 가장 중요시 생각하며 스스로 외롭지 않은 이, 고립되어 있지 않는 이인 척 위장을 해야 했다.
인간의 위장술은 그렇다. 인간의 위장술은 '진정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행복과 성공을 과시하는 사회적 위장술이다. 이것은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 두드러진다.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위장하여 '행복', '성공'으로 둔갑한다. 넙치의 등껍질처럼, 인간의 위장술이 얼마나 위대한가.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종을 속인다. 고로 자신의 위장능력에 대해서는 깜빡 잊고, 남들의 위장술에는 깜빡 속는다. 고로 모래 등껍질을 하고 혼자라는 착각에 빠진 '광어'를 닮았다.
이 외면적인 행복의 표현 뒤에는 역시 너도 나도 공유하고 있는 '영장목' 고유의 숨겨진 외로움과 고립감이 있다. 이런 외로움과 고립감은 다른 위장술의 대가들에 의해 완벽하게 속아 더 곪아간다. '외로움'과 '괴로움', '고통' 이것은 인간류 전반이 가진 내재된 감정이다. 이것을 완벽하게 숨기고 속는 과정에서 우리는 꽤 많은 오류를 범한다. 이 과정을 보면 '발가벗은 임금님'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발가벗은 임금님'에서 모두는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옷은 '바보'에게만 보이지 않는 옷이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사람들은 발가벗은 임금님을 보며 보이지 않는 옷에 감탄한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만 진실을 말한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옷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아이가 진실을 외치기 전까지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그 최초의 '바보'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그렇지 않은 척하는 사회를 닮았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를 보면 꽤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사실 이 동화의 일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작가 '루이스 캐럴'의 병와 같은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화가 가지고 있는 '말장난' 때문이다. 이 동화에서는 영어권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이 몇몇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동화의 그런 재미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 동화를 최고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 속에서 자신을 포장하고 돌아서서 자신만 혼자라고 느낀다. 고로 자신감 넘치는 '소셜미디어' 속 세상과 다르게 모두가 그 안에서 고립되고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은 워낙 이기적이다. 고로 자기 밖에 모른다. 자신은 속이며, 다른 이들에게 속인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만들어 내나. 인간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지만 그렇지 못하다. 둘이 있을 때는 외롭다하지 않다가, 서로 하나가 되면 자신만 외롭다한다. 실패, 좌절, 우울, 실망, 자책, 두려움, 외로움. 이런 것은 혼자 일때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다만 그것이 유일하게 나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자각만 하더라도 이런 감정에서 꽤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 그런 감정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인류의 뇌속에 잠재된 디폴트값이다. 고로, 그것은 당연하다는 인지를 하고 살아가는 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