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에는 10대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고통 스러울 때는 고통스러울 때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심심할 때는 심심할 때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마찬가지로, 그때의 감정이 오롯한 흔적이 됐을 때, 그 글에서만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고로 자신의 오늘과 지금의 감정에 충실한 글을 쓰다보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시계 바늘이 어느 순간 하나 둘, 맞아가며 완전히 이기적인 글들이 결국은 강력히 이타적인 글들이 될 것이다.
몇 년 전 썼던, 글에 댓글이 달렸다. 힘든 시기에 위로를 받았다는 글이다. 돌이켜 읽어보니, 내가 썼던 흔적은 분명하나, 시간의 탈것을 타고 한참을 벗어난 지금, 나는 그 생각과 감정, 주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지 오래된 후다.
글 주인도 잊어버린, 주인 없는 글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썼던 지난 5년의 흔적이 광선을 타고 빛의 속도로 뿌려진다. 그것들은 형체없는 클라우드로 두둥실 떠다니다가, 우연하게 누군가의 가슴에 꽂히는 모양이다. 내가 받은 어떤 감동도 주인이 잊어버린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된 발라드를 하나 들었다. 가만히 상념에 젖어든다. 다시 생각해본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과연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와 작사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가. 나에게 적잖은 감동과 위로를 주던 음악의 원주인들은 아마 그들이 남긴 흔적과 다른 '감정'과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정작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만 보더라도 헛웃음이 나질 않던가. 마치 그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느 귀여운 아이의 일기장인 것 마냥 하지 않던가. 그러고보면 나는 그저 '매순간의 나'로만 존재할 뿐, 지나온 '나'와 마주할 '나'는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일지 모른다. '나'는 무수하게 바뀌어가는 '감정'이라는 점의 연결선일 뿐이다. 고로 과거의 나의 흔적을 밟고 찾아온 누군가의 '비난'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며, 앞으로 다가올 나의 경로를 걱정하는 누군가의 '걱정'도 이미 '나'의 것은 아니다. 나의 것은 오로지 지금이 이순간 여기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지적한 일이 나에게 울림을 주듯, 누군가의 '비판'에도 배움을 갖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에도 '깨달음'을 얻듯, 누군가의 '걱정'에도 응원의 힘을 받는다. 진로라는 것은 내가 설정한 방향일 뿐이지, 정답은 아니다.
돌을 쥐고 어느 방향으로 던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 방향으로 던지면 좋다. 던져서 목표물을 맞혀도 좋고, 맞추지 않아도 좋다. 쥐었던 돌을 다시 제자리에 두어도 괜찮다. 그 돌을 주어다가 반대 방향으로 던저도 괜찮다. 삶은 그저 내가 설정한 방향으로 진행해 보겠다는 일종의 '놀이'일 뿐이다. 우리는 어제의 내가 던진 지도를 받고 오늘을 움직이며, 내일의 나에게 그 방향을 지도할 뿐이다. 삶은 어제와 오늘 내일이 주고 받는 릴레이 경주일 뿐이다. 그러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내일의 나는 언제나 같지 않으며 그것을 인정한다면 과거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사라지고, 내일의 나에 얽매일 이유가 사라진다.
고로, 오늘, 지금, 여기의 나에 대한 글을 써라. 그것은 나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길라잡이이며, 누군게에게는 아주 적절한 위로이며, 누군가에게는 충고가 되고 다시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