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훈련을 하는 영상을 본 적 있다. 한 군인이 훈련병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훈련 혹은 단련과는 별개로 폭언과 인격모독이라 할 수 있는 고성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는 '멘탈 강화 훈련'이라는 이상한 명분이 붙었다. 단언컨데, 멘탈은 그렇게 훈련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 폭언과 인격모독을 견뎌내는 훈련을 하면 그 감각이 무뎌져 더 단단해진다는 논리다. 폭언과 인격모독이 멘탈을 강화하는 훈련법이라면 '붓다'는 '명상', '참선'에 대한 '정신수양'이 아니라 '폭언과 인격모독'에 해당되는 수양법을 전달했어야 한다. 멘탈은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수용력 내에서 관리하고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인기 만화 '피너츠 시리즈'에 등장하는 스누피는 이렇게 말한다.
"주어진 카드로 승부를 볼 수 밖에 없어."
인생은 공평한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 불공평하다. 카드 게임과 같다. 합의한 규칙 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카드로 승리를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는 좋지 않은 카드를 이용하게 게임을 리드하고, 누군가는 꽤 괜찮은 카드를 들고 있으며 '패배'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나 똑같은 카드를 들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키, 외모, 지능, 성별' 등 우리는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을 기본값으로 부여 받지만, 주어진 카드로 승부를 볼 수 밖에 없다.
'멘탈' 역시 모두가 같지 않다. 누구는 강한 멘탈을 갖고 있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신장의 크기와 같이 크거나 작다. 네이트 로빈슨은 175cm의 비교적 작은 키를 가진 농구선수다. 그는 평균 신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를 갖고 있었지만 무려 세번이나 슬램덩크 챔피언이 될 정도의 탄력을 가진 선수였다. 그가 '탄력'이 아니라 '신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정신적 스트레스 수용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소모성이다. 사용하고나면 소모되어 버린다. 그것을 강화한다고 자그마한 상처를 꾸준히 내다보면 정신은 무너져 버린다. 고로 상대의 '멘탈 강화'를 명분으로 '폭언'과 '직설'을 날리는 사람을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삶에서 성장을 위해, '상처'와 '실패', '좌절'은 필수적이다. 다만 그것을 꾸준하게 얻는 것이 '성장'은 아니다. 그것들이 왔을 때, 어떻게 그것들을 이겨 낼 수 있는지 휴식과 성찰, 명상 등의 활동일 필수적이다. '견뎌내기 위해' 더 작은 상처를 꾸준하게 내는 것은 훈련이 아니라, 파멸 시키고자 하는 열정일 뿐이다. 자신의 수용력만큼 수용하고 충전하여 다시 그것을 수용하길 반복하며 유릿잔 같은 약한 멘탈로 상처와 실패, 좌절을 이겨내는 것이다. 붓다는 오랜기간 고행을 했지만 엄청난 고통을 이겨내는 와중 고행을 멈추었다. 그가 고행을 멈춘 이유는 고행 속에서는 마음이 피폐해질 뿐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고행과 쾌락의 중간 지점인 중도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중도의 길은 지나친 고행이나 지나친 안락에 치우치지 않는 적절한 삶의 방식을 말한다. 이를 통해 마음과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정신적 여유를 얻을 수 있다. 수 천 년 전, 한 수행자가 수 년간 고행한 끝에 자신의 수행법이 틀렸다고 여긴 이후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 수행법으로 정신력을 강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때로 누군가의 '멘탈'을 부숴 뜨리고 크게는 작게는 기분저하, 우울감으로, 크게는 우울증과 자살로 키울 수 있다. 결국 유리멘탈을 받아든 것은 감내 해야 할 몫이고 이미 그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그 유리멘탈로 더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을지 알아봐야 하다.
정신력은 '배터리'처럼 일정량의 수용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용할수록 줄어들고 이후 재충전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각자마다 수용력의 차이가 있듯, 누군가는 한 번의 충전으로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고, 누군가는 여러 번 충전해 주어야 한다. 재충전의 과정만 제대로 가진다면 전자기기는 큰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만약 빠르게 배터리를 소모하고 오랫동안 그 상태를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방전된다. 방전된 전자기기는 아무리 충전해도 충전되지 않는다. 우리의 멘탈도 그렇다.
한 심리학 교수는 물이 든 유리잔을 비유로 스트레스 관리를 설명했다. 유리잔을 들고 있을 때, 그 잔의 실제 무게는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1분을 들고 있을 때와 하루종일 들고 있을 때, 그 우리가 느끼는 유리잔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아무리 가벼운 잔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계속 들고 있다면 그 고통은 심각한 상황이 된다. 인생의 스트레스도 그렇다. 앞선 스트레스의 무게와 지금의 무게를 고스란히 얹어 들고 있다면 잔을 내려 놓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멘탈 관리라고 하는 것은 신체 성장과 성장 방식이 다르다. 근섬유를 찢고 그 상처 사이에 단백질을 채워 넣으며 성장하는 근육과는 다르게 '멘탈'은 이미 각자만의 수용력 내에서 그것의 소모력을 관리하며 사용해야 한다. 고로 멘탈 관리는 '상처, 폭언, 인신공격' 등에 꾸준하고 잦게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명상과 감사함을 생활화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