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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an 22. 2024

[생각]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순간, 온 세상은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

미국의 시인 '엘라 휠 윌콕스'의 '솔리튜디' 일부다. 올드보이에서도 차용된 이 문구는 상대적인 세상 속에 우리가 취해야 할 마음가짐을 말한다.

 세상은 상대적이다. 가만히 있어도 길을 가다가 '칼'에 맞는 삶이 있고, 가만히 있어도 '돈벼락' 맞는 삶이 있다. 그것을 조금 고상하게 말하면 '카르마'라 할 수 있다.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카르마를 갖는다. 모든 것은 '그래야 할 이유'가 존재한다. 이유없이 일어나는 결과는 없다. 어떤 카르마를 쌓고 살았는지에 따라, 과거는 아름다워지거나 괴로워진다. 어떤 카르마를 쌓고 살았는지에 따라, 세상은 아름다워지거나, 험상 궂어진다. 굳이 어떤 카르마를 쌓았느냐와 상관 없이, 당장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도 큰 맥락에서 '카르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점은 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카르마'가 되기도 한다.

 왜 우리가 웃어야 하는지 말이다. 미국 시인, '엘라 휠 윌콕스'가 아니더라도 모두 알고 있다. 웃음은 '함께'할 때 더해지고, '울음'은 '혼자'할 때 더해진다. 모두가 웃고 있는 세상에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할 것인가 혹은 등을 돌리고 고립될 것인가. 그 결정은 매우 능동적인 선택이다.

 세상이 웃고 있다는 전제는 맞는가. 아닐 수 있다. 세상은 분명 일방향으로 존재하진 않는다. 고로 세상은 웃거나, 울거나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역시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변하지 않는다. 웃고 있는 절반과 울고 있는 절반이 각각 세상을 양분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무지하게 거대한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지평선의 한계까지 밖에 체험할 수 없다. 아무렴 세상이 그 밖으로 수억 만 리 펼쳐져도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언제나 우리의 시야 밖에 생성되지 않는다. 고로 나머지 절반이 '악'으로 가득찬 세상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세상에 대한 객관성을 굳이 판단할 필요는 없다. 뜰채로 잘 걸러내듯, 그저 긍정적인 세상만 바라보더라도 우리의 세상은 우리가 담을 그릇에 차고 넘칠 것이며 담겨진 모든 것을 엎고 다시 채운다고 해도, 세상의 극일부도 담지 못한다. 무엇을 선택하여 담을지에 대한 선택만 남은 상황에서, 과연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운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만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변할 뿐이다. 그것을 그것이라 정의하기 때문에 그것이 되는 것이지, 그것에 그것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그것일 뿐이다.

 유명 힙합그룹 에픽하이의 '연애소설'에는 '관계'에 대해 나온다.

 "우리 한때, 자석 같았다는 건 한 쪽만 등을 돌리면 멀어진다는 거였네."

 끌어당기는 인력은 한쪽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력은 양방향의 관계에서 나온다. 주어진 극에 따라 어떤 방향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자석에게는 인력과 척력이 둘 다 생긴다. 어째서 끌어당기기만 하는가, 어째서 밀어내기만 하는가. 그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그것과 나의 관계가 어떤지이고, 그 관계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다. 상대가 뒤를 돌고 있다면 이쪽에서 방향만 돌리면 된다. 척력은 이제 인력으로 바뀐다. 엉덩이가 무거운 '만물'의 방향이 나를 위해 움직여주길 기대하기 어렵다면, 만물만큼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상대와 나, 누구 엉덩이가 더 무거운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느라, 시간과 감정 소모를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상대는 '만물'이며 '만물'과 대항하는 것은 '신'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려는 욕심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시포스'는 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다. 그의 처벌로 죽음 후에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리는 형벌을 받는다. 다만 바위는 항상 정상에 도달하기 직전에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시시포스는 다시말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일을 반복하는 형벌의 고통에 시달린다. 끝나지 않는 싸움에서 생기는 그 고통과 번뇌는 시실, '무지'가 핵심이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다. 

 랄프 랄도 에머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순간, 온 세상은 나의 적이 된다."

 세상은 가령 예를들면 서풍으로 몰아치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마주섰을 때는 나를 주저 앉히는 힘이 되지만, 그것을 등지고 서면 나를 등떠미는 응원 같은 것이다. 세상이 갖고 있는 에너지는 변함이 없고 일관적이다. 고로 그것이 나를 굴복 시킬 때는 아주 매섭게 몰아치고, 그것이 나를 응원할 때는 그또한 매섭다. 만약 스스로가 스스로를 의심한다면 세상은 나를 매섭게 몰아칠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다면 그 또한 세상이 도움의 손길을 줄 것이다.

 나를 지지해 줄 것을 강해게 바랄 필요없다. 그것은 판단 없이 매순간 몰아치고 있고 그것에 대한 방향 설정은 오로지 스스로 할 뿐이다.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관점이 가장 중요하다. 한때는 나를 넘어뜨렸던 '걸림돌'은, 새로운 장애를 넘어서야 할 때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돌'은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그것은 정의하기에 따라 정의된다.

 이름 붙이기 전에는 그저 몸짓에 불과하다가, 이름을 붙이면 꽃이 된다. 정의는 정의할 때 생기는 것이다. 고로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온전하게 스스로 존재할 뿐이다. 현재 나는 어느 방향을 보고 서 있는가. 그것은 삶의 에너지가 되고 때로는 죽음의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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