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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20. 2024

[소설] 사랑하는 사람을 먹는다는 것은_구의 증명

 16세기 스코틀랜드의 어딘가 였다. 그 곳에는 '소니 빈'이라는 남자가 살았다. 그는 사회와 법률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인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사회를 등지고 살기로 했다. 이들이 택한 곳은 스코틀랜드 해안을 따라 있는 외딴 동굴이었다. 둘은 이 동굴에 터전을 잡기로 한다. 새로 잡은 터전은 그들의 새로운 집이자 세계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가족을 이루었고  자신들만의 '생활 방식'을 만든다.

 생존을 위해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꽤 충격적인 방식이다. 그들은 밤이 되면 가족 구성원들과 동굴 주변을 순찰한다. 그러다 마주치게 되는 여행자들을 타겟으로 했다. 어두운 밤, 여행자들을 습격하고 그들의 물품을 훔쳤다.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시신을 식량으로 삼았다. 시간은 점차 흘렀다. 대략 25년의 시간이 지났다. 소니 빈의 자식들은 다시 자식을 낳는다. 그렇게 그들만의 사회가 구성된다. 이들은 자신의 생활 방식을 문화로 받아 들인다. 누군가는 사냥을 하고 누군가는 식량을 손질한다. 누군가는 내장을 비롯한 불순물을 바닷가에 버리는 일을 한다. 이렇게 분담된 일을 하면서 이 가족 구성원은 마흔 여덟 명까지 늘어난다.

 살인과 식인에 대한 죄책감은 그저 '사냥'과 '조리'라는 단순 '문화'로 자리 잡는다. 그들 일가족의 이야기는 결국 사회에 알려진다. 소니 빈 가족은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입장에서 '약육강식'은 '죄의식'과 큰 영향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몰랐으며 자신이 사냥했던 많은 '식량'들 처럼, 자신들도 곧 '강자'에게 잡힌 먹이감의 운명이 됐음을 직시했다.

 이 이야기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소니빈의 이야기는 실제 역사와 설화의 중간 경계에 서 있다. 실제 그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가만히 지켜 보건데, 이는 근대에서의 어떤 일과 유사하다. '악의 평범성'.

 20세기 정치 이론가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보도하면서 사용됐다. 아이히만은 대량 학살과 같은 끔찍한 범죄에 관여한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악'과 거리가 멀었다. 아렌트가 관찰한 그는 '평범하고 성실한 공무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덕적으로도 평범했던 그가 그처럼 악한 인물이 된 이유는 일상적인 환경에서 단순 명령과 복종 혹은 체계의 일부로써 자신도 모르게 '악'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단순한 업무처리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악'은 특별한 '악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순히 사회 시스템에서 커다란 맥락을 바라보지 못했을 때 조차 발생한다.

 그렇다면 '소니 빈'의 가족 또한 다르지 않다. 애초에 태어났을 때 부터 '살인과 식인'에 길러진 '소니 빈'의 자녀와, 그 자녀의 자녀들은 자신의 행위가 '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돼지'와 '소'를 도축하고 불에 그을려 포식한다. 그들을 살육하고 포식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다만 대상이 '인간'이라면 거기에는 '죄'와 '악'이라는 이름이 여지 없이 들어간다.

 가만 보면 그것은 '인간'만의 독특한 습성은 아니다. 자연계에서 '동족포식'은 흔한 일은 아니다. 그 이유를 따지고 들면 몇 가지가 있다. 개중 진화론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동족을 잡아 먹는다는 것은 다른 종을 잡아 먹는 일에 비해 꽤 비효율적인 일이다. 자신보다 나약한 종을 잡아 먹는 일에 비해 더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꽤 큰 위험 부담도 지어야 한다. 자연계에서는 '유전적인 차이'로 인해 '강자'와 '약자'가 나눠진다. '사자'는 같은 '사자'를 잡아먹지 않는다. 유전적 차이가 비슷한 경우에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가 한다. 이들은 '토끼'나 '사슴'과 같은 상대적 약자를 잡아 먹는다. 그것은 훨씬 더 효율적인 포식 방법이다. 이처럼 유전적 차이가 명확한 경우, 힘의 논리가 명확하게 사용된다.

 우리 인간은 어떤가. 가만 보면 인간의 DNA는 서로 비슷하다. 다만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DNA'뿐만 아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돈'과 '사회적 지위', '환경'도 포함된다. 이렇게 '사회적 DNA'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약자'와 강자'가 생겨난다. 과거에는 동족을 사냥하는 일이 '에너지적으로 비효율'에 해당됐지만, 사회가 점차 양극화 되면서 서로 물려받는 '사회적 DNA'에는 '사자'와 '토끼'만큼의 차이가 발생한다.

 인간이 실제 인간을 포식하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이런 일은 쉽게 벌어진다. 우리 사회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강자가 약자에게 포악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실제 '악'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악의 평범성'이 떠오른다. 자신은 실제 어떤 죄의식도 갖지 않으며 당연한 절차를 진행해 온 성실한 아무개라는 의식 말이다. 인간과 인간의 격차가 점차 서로를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격차로 벌어졌을 때, 어쩌면 강자나 약자 모두가 사냥하고 사냥당하는 관계를 너무 당연하게 여길지 모른다. 우리가 사자가 '악', 토끼가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은 구와 담이라는 '남과 여'의 이야기다. 구를 먹음으로써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되는 꽤 도발적인 주제다. 다만 그 이야기는 섬뜻하거나 더럽다기보다 안쓰럽고 씁쓸하다. 어쩌면 포식자로부터 동족을 지키기 위한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다. 소설을 다 읽고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는 '창세기'의 '9와 숫자들'이라는 음악을 들으며 이 소설을 집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끝부분에 이 음악을 들으며 '잔잔하게 퍼지는 여운'까지 이 소설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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