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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03. 2024

[수필] 소유의 역설,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질 수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진다."

 모든 건 관점에서 시작한다. 타의에 의해 '무소유'하면 '가난'이 되지만 자의에 무소유하면 '해방'이 된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장미꽃에 돋은 가시'와 '가시에 핀 장미꽃'처럼 명확하게 다르다. 흔히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처럼 관점의 차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사람은 세계를 가만히 두고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관점의 차이이며 이것을 갈고 닦는 것을 '수행'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관점을 가진다. '남산'을 두고 '남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남쪽'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두고 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은 정의된다.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음이 아니다. 설령 '무소유'를 말씀하신 '법정 스님'조차, 그의 '이름'을 소유했고 '무소유'에 대한 철학을 수요했다. 본디, '무소유'는 역설을 맞는다. 그러나 그가 말한 '무소유'는 단순히 '갖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 '무소유'는 집착을 끊어낸다는 의미다.

 무언가를 소유할 때, 우리는 대상에 '집착'을 갖는다. 그것이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강한 집착은 단순히 '관념'일 뿐이다. 우주에서 '본래 나의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으며 세상에 잠시 빌려 쓰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본래 '내 것'이 없다는 없다는 인식은 '무소유 철학'의 근본이다. '내것'은 없다. 불교 철학에서 말하길 아상, 즉 '나' 또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마당에 '나'의 '소유물'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철학으로의 불교는 과학적 인식이 근간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꽤 중요한 이슈다. 특히 '양자역학'과 연결하여 '불교와 도교철학'은 자주 사용된다. 모든 것은 '관찰자'가 중요하며 관찰하는 자가 없을 때, 그것은 오롯이 확률로만 존재한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과 '도교' 심지어 '기독교'마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같다는 것이다. 옛 성인들은 자신들의 찾아낸 본질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정리했다. 다만 그것을 전달하는 '학자'들은 그것에 '학문'과 '종교'의 이름을 빌어 분석하고 분류하고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용어'와 '언어'가 생겨났고 하나의 진리가 수백만 조각으로 쪼개어 단번에 인식하기에도 어렵게 변해졌다.

 '도교'는 세상 만물의 근본 원리나 본질을 '도'라고 정의했다. 노자가 말했던 '도가도 비상도' 즉,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는 더 이상 '도'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다. 우리 언어가 가진 한계를 뛰어 넘는 하나의 덩어리를 뜻 한다. 이것은 섞이고 뭉치고, 분리되고 혼합된다. 아주 서서히 규칙적이면서 불규칙적이고 겉이면서 속이고, 안이면서 속이다. 하나의 촛불이 어두운 방을 밝힐 때, 그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명확히 존재하지 않듯. 아주 작은 단위로 무수히 그라데이션되어 있다. 이것은 '도가'에서 말하는 '세상 만물'이다. '도'의 관점에서 '나' 또한 '도'의 일부다. 불교 철학에서는 그 반대이다. '우주만물'로 시작하여 '나'로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 확장하여 '우주만물'로 확장된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옷을 입는다. 옷을 입지 않더라도 사람을 구성하는 성분에는 미생물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일부인 손톱과 머리카락은 죽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케라틴이라는 단백질로 만들어진 섬유질 구조물일 뿐이다. 즉 우리몸에 털과 각질을 포함해 다양한 구성 성분은 실제로 몸에 착용하는 '옷'만큼이나 '나'와 다른 무언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른 무언가'로 인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식상 나를 확장하여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과 각질까지 자아로 인식한다. 또한 입고 있는 옷과 안경 때로는 어떤 악세서리까지 그것을 '자아'로 인식한다. 이렇게 나의 인식 범위를 넓히다다 보면, 나의 범위는 가족과 친구, 친지를 넘어 '상대', '국가', '인류'로 까지 확장된다. 이런 자아의 확장을 무한대로 확장하면 우리를 구성하는 '수소'와 '산소', '탄소'를 포함한 작은 원자 알갱이를 공유하는 세상 만물로 확장된다. 결국 '나'를 확장하면 그 끝에는 '우주'를 만난다. 이것은 금강경의 철학이다.

 즉, 소유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다. 고로 자아를 확장하는 순간, 상대에게 가 있는 나의 소유물도 결국은 '나'의 확장일 뿐이며, 상대 또한 '나'일 뿐이다.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 '빼앗겼다'라는 인식을 하지 않듯. 무소유란 실제로 갖지 않는 것이 아닌 가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인식을 달리하는 일이다.

 결국 무소유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과 '상황', '감정'에서도 적용이 된다. 어떤 인연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상황도 머물러 있지 않으며, 어떤 감정에도 휩쓸리지 않는 것이 무소유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조금씩 섞여가며 바뀌고 섞이고 달라진다. 결국 감정, 사람, 상황 모든 것은 영원불멸할 것 같은 인식의 착각 속에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런 것들은 한낱 바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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