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인환 May 18. 2024

[소설] 가볍게 읽어야 하는 이유_미중전쟁2

 김진명 작가의 소설을 자주 보진 않았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던지, '킹메이커'를 보면 '실존인물'의 '실명'이 등장한다. 소설이 워낙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기에 소설을 '실제'와 헷갈리는 사람도 있기도 한다. 소설이야 그저 재밌으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과 구분할 수 없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다르게 봐야할 것 같다. 어디서부터 실제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모호하고 그 경계에 작가 가치관이 섞여 있을때, 소설은 약간 위험할 수도 있다.

 다만 아예 배경 지식이 전무할 때, 대략의 윤곽이 잡힌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의 장점도 분명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딱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의 소설을 보기 위해서 그 전과 후로 적잖은 책을 읽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원래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다. 제3자가 아니라 자신을 보아도 그렇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사람은 '과거'에 의해 '현재'가 정의된다. 즉,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지금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만 '아들러'에 의하면 사람의 과거는 '현재'에 의해 정의된다. 즉,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원인론과 목적론 중 나는 '목적론'에 애정이 간다.

 사람은 슬프고 싶기에 과거의 기억을 불행에 가깝게 편집한다. 즐겁고 쉽기에 과거의 기억을 행복에 가깝게 편집한다. 슬프고 즐겁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의 '나'이다. 그런 이유에서 과거는 '운'과 '불운'의 해석이 오락가락하는 '새옹지마'와 같다.

  과거의 기억이 행운이 된 것은 '지금' 때문이고, 과거의 기억이 불운이 된 것 또한 '지금' 때문이다. 도망간 말이 다른 말을 가져오고, 말을 타고 놀던 아들이 다리가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진 아들이 군징집을 피할 수 있다던 '새옹지마'의 이야기를 보자면 모든 것은 해석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좋고 나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도 입체적이고 다면적인데 어떤 사람을 '어떠하다'라고 정의할 순 없다. 물론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 만들기'다. 캐릭터는 복잡하기보다 단순할 때 이해하기 쉽다.

 '트럼프'는 이럴 것이다.

 '푸틴'은 이럴 것이다.

 '문재인'은 이럴 것이다.

 실존 인물의 과거를 일반화하여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쉽게 꿰어 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모든 것이 그렇지 않겠는가. 과거에 그러 했던 사람도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 사람이 그렇다고 봤던 이유는 내가 그렇게 봤기에 그럴 수도 있다. 단순한 논리다.

 '링컨'은 말년에 대통령직을 한 번 수행 했을 뿐이지만 우리에게 그는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으로 여겨진다. 다만 그의 삶, 대부분은 '사업' 혹은 '변호사' 였다. 그 또한 크게 존경 받거나 성공에 이르렀다고 할 수만도 없다. 우리가 그를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느 시점에 어떤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정치'와는 별개로 '주식'에서 이런 말이 있다.

 '주식은 신도 모른다.'

비슷하게도 뉴턴이 자신이 평생 벌었던 자산을 투자에 실패하며 말했던 바도 떠오른다.

 "우주의 이치를 계산 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예측할 수가 없다."

 방향과 속력을 알면 다음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거시물리학과 다르게 사람의 미래는 양자역학처럼 '알 수 없다'로 정의된다.

 속력과 방향을 알았다고 다음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10년 간, 꾸준히 담배를 피웠던 사람의 내일 역시 담배를 피운다로 정의 한다면, '담배를 끊는 사람'이라는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예측불가하기에 우리의 삶이 이처럼 다채롭고 '주식시장'과 '인간 심리', '정치'와 '국제정세'가 어려운 것이다.

 한창의 나이에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을 들었던 적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보니, 그가 했던 예언이 웬만하면 적중했단다. 그 신과 같은 능력은 믿음직스럽다기보다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래를 예측한 이들의 이야기에 흠뻑 젖어있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그러한 이야기를 '허무맹랑'이라 본다.

 우리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아바바바'를 보고도 '아빠'를 떠올린다. 달 표면에 있는 얼룩을 보고 토끼와 절구를 떠올리고 하늘에 의미없이 떠있는 구름의 모양으로 '토끼'라던지, '강아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아무렴 아무말이나 하더라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아'가 되고 '어'가 된다. 지금의 '밈'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 중 하나가 '무한도전'이다. 거의 모든 '미래'를 미리 예측하는 듯 한, 여러 짧은 영상과 화면은 실제로 예측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산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것'이라는 사실보다 우리가 '그것'을 '그것'이라고 본다는 사실이다.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떻게 썼는지보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아는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지 고민해 보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글에서 '나'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이 일어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