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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y 19. 2024

[미래] 저출산 고령화, 오히려 좋은 이유?_초고령사회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문제가 자주 언급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개인적인 의견은 '해결 할 수 없다'이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비단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 추세다. 식단의 서구화로 청소년 신장이 커졌다거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피부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늘어났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사회적 변화'가 '생물학적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생각보다 꽤 많다.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질병이 치료 가능해졌고 예방접종과 항생제, 만성 질환의 관리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대 수명' 역시 늘었다. 그것은 '사회적 변화'가 만들어낸 '생물학적 변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채택하는 국가는 필연적으로 '여성의 교육 수준과 노동 시장 참여'가 높다. 사회가 고도화 되기에 청년이 '사회 활동'을 하기 위해 기대되는 '교육 기간'도 연장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고도 기술 사회는 당연히 고학력 사회를 필요로 하고, 고학력 사회는 긴 교육시간을 필요로 한다. 출산율 감소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 생기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자원이 적은 '동아시아' 국가는 '인력'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다. 서구 다른 국가들보다 더 빠른 인구 감소를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역사'와 '사회구조'를 원인으로 두고 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는 '독일말을 사용합시다.'가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는 과거에 연결된 오늘을 살고 있다. 고로 갑자기 끊어내지 못하는 사회구조는 '당장의 변화'가 아니라 '점차적인 변화'와 적응이 필요한 문제다.


 출산률이 감소하고 인구가 고령화 된다면 '노인부양'의 문제가 대두된다. 과연 그럴까. 1960년대 대한민국의 기대 수명은 54세였다. 지금 현대 대한민국의 기대수명이 100세에 가까워진다. 짧은 시간에 생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다만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그보다 느리다. 다시말해, 1960년대에 환갑잔치는 꽤 큰 행사였다. 기대수명을 웃도는 장수를 축하하는 행사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의 환갑은 간단히 가족과 저녁식사를 한다거나 조금 더 의미있는 '생일잔치'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노인부양'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다. 과연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노인의 수'가 아니라, '노인'이라는 정의를 바꾸어야 한다. 기대수명이 54세였던 시기와 기대수명이 80세가 넘는 시대에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1960년대 평균 신장도 큰 변화가 있었다. 대략 10cm의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서 그 시대에 남성의 키 170cm면 장신에 속했다. 지금의 170cm는 분명 같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신장에 속한다. '농업 국가'였던 과거에는 그들이 할 수 있던 '생산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정보 시대인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그들은 역시 적잖은 생산능력을 갖고 있다. 분야에 따라 다르긴 해도 분명 젊은 층 보다는 더 큰 생산능력을 갖췄다. 워렌버핏의 대부분의 자산이 노후에 생겼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나이가 들면 반드시 생산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출산율 감소는 분명 국가적으로 큰 재앙에 가깝다. 다만 인구가 늘어나는데는 출산률이 전부는 아니다. 많이 태어나고 빨리 죽는 것이 그만큼 재앙이다. 이런 재앙은 이미 대한민국에 있어왔다. 정보화 사회에서 사람이 빨리 죽는다는 것은 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재앙에 가깝다. 그런 재앙도 지금의 재앙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다. 그것을 이미 지나갔기에 그 공포심이 덜 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기대수명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태어난 이들은 일찍 죽지 않고 장수한다. 인구 피라미드를 보면 '르완다'나 '이집트'처럼 아래로 넓게 펼쳐진 구조가 있다. 또한 일본이나 한국처럼 아래로 좁아지는 구조도 있다. 그러나 30년 뒤에 '대한민국'과 '일본'을 '르완다'와 '이집트'가 추월해 가는 사회는 상상하기 힘들다. 고도 개발 사회는 피라미드 상위층이 넓어야 유리하다. 하위층이 넓은 피라미드는 최소 30년 간 '생산 능력' 없는 '소비 개층'이며 이들은 한창 생산할 '중위 개층'의 부담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사회가 꼭 암울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미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착시에 가깝다. 고령화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저출산'은 '생산 계층'의 부담을 줄이는 역할도 한다. 적게 태어나서 오래 사는 시대를 받아 들이기 위해, 우리는 '공포'가 아니라 '대비'를 해야 한다.


 그간 '청소년 사교육 시장'을 열었던 과거의 시장을 '성인 사교육' 시장으로 변화할 수 있고 '사라지는 초등학교'를 '노인 학교'로 개교할 수 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시장과 사라지는 시장을 잘 판단하여 그 중간 지점에서 지혜롭게 변해가는 것은 아예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가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완성된 시설 기반을 바탕으로 기존 산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이미 일본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적자원'을 통한 성장이 필수적인 사회가 된다. 우리가 먼저 맞이하게 될 사회 변화는 다른 의미로 '산업 지배력'으로 이용 될 수 있다. 뉴스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내는 공포에 굳이 두려워하고 좌절해서는 안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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