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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y 22. 2024

[심리] 사실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_하루

 그렇다. 큰일이라 생각한 일 뒤에도 '아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사건을 맞이 한다. 나를 삼켜 버릴 위협도 있다. 그러나 깨달을 때도 됐다. 나를 덮칠 듯한 위협 뒤에도 '아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고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사업을 망친다. 시험에 떨어진다. 기회를 놓친다. 인생을 바꿔 놓을 결정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그 뒤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가 결정되는 순간,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다른 선택지는 사라진다.

비교대상은 사라진다. 사건 발생과 동시에 사라진다. '현실'만 남고 모두 사라진다.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이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됐는데, 사람은 그것에 의미를 둔다.

 바뀌는 것은 없다. 그냥 일어났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맞이할 뿐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럴 수도 있었는데...' 혹은 '그럴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이 마치 내것이었던 것처럼, 마치 내것으로 올 것처럼 아른 거린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으로 오고 간다. 머리로 진리를 깨우쳐도 행하기 어렵고 마음은 저절로 일어나며 '나'는 그것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하나처럼 보이는 '자아'는 사실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아'를 분열한다.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 등. 나를 구성하는 내면과 외면은 일체화 되지  못한다. 

'해야 하는데...'하지 못하는 일, 

'하면 안되는데...' 해버리는 일,

 '부조화'는 불안을 야기한다.

 바벨탑 이야기를 해보겠다.

성경 구약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시기다. 노아의 홍수 후, 모든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 함께 모여 살고 화합했다. 인류는 목적을 가졌다. '하늘'에 닿는 일이다. 야심찬 계획은 가능해 보였다. 신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끈기? 노력? 열정? 꿈과 희망?

 아니다. 

 소통이다. 신은 인간의 계획을 무너 뜨리기 위해 '소통'을 막았다. 소통이 중단되자 탑쌓기는 중단됐다.

 무슨 일이든 '집중'이 중요하다. 집중은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회사는 회의를 통해 사업을 전개하고, 정치는 소통을 통해 국민을 통합한다. 그렇게 하나로 모아지면 꽤 어려운 일들은 그럴싸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여러 사람도 아니고, 하나의 '나'를 구성하는 마음과 감정, 행동, 생각, 말이 모두 따로 움직이면 어떻게 이루고저 하는 바가 이루어지겠는가. 마치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작동된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서로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일체화를 떠나 어떤 상태인지 관심도 없이 마구잡이다.

 축구를 한다며 오르손은 오른쪽으로, 왼손은 왼쪽으로 힘차게 돌리고 머리는 위아래로, 오른 다리는 뒤로, 왼다리는 앞으로 움직인다. 그 정신없이 산만함을 갖고 경기장에 들어 섰으니, 체력과 실력은 둘째치고 '축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한다.

 차분히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을 하나로 모으려면...

일단은 그렇다.

그것들이 뭘 말하는지는 듣고봐야 한다.

 윗집과 아랫집이 싸우고 있으면 서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귀 기울이고 봐야 한다. 그 소통의 첫째는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물을 맑게 하려면 가만히 두어야 한다. 가만히 두면 물결이 고요해지면서 온갖 티끌이 가라앉는다. 물은 점차 맑고 깨끗해진다.

 후회라는 낚시로 끌어당기는 '과거'와 '희망'이라는 낚시로 끌어당기는 '미래'에 줄이 손발이 꿰어 움직이는 현재를 살고 있다면 그 시간의 노예에서 벗어나 차라리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왼쪽 발가락 네번째의 감각을 느끼는 편이 훨씬 낫다.

 스스로를 돌이켜보건데, '일치하지 않는 자아'는 일반적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상대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일체화된 자아를 갖고 있나'.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했던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처럼, 상대는 스스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고로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코코샤넬은 상대를 겉으로 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다만 상대는 자신을 겉으로 평가할 것이라 했다. 즉, 나는 상대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되, 스스로는 정제된 자아를 가질 수 있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 나의 '자아'는 지금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지금도 고삐 놓쳐 촐랑거리는 망아지가 제멋대로 나를 헤치고 있진 않은지 잔잔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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