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을 수도 있다.'
카뮈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무관심한 태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도 주인공은 동요하지 않는다. 오늘이던가, 어제이던가, 헷갈려 하는 것이 극단적인 '사회 이방인'을 말한다.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면 그 도입부가 비슷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도입도 이와 같이 시작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극단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는 강하게 독자를 흡입한다. 소설 '이방인'에는 '감정'이 없다. 그저 현상이 있을 뿐이고 '생각'이 있을 뿐이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일컬는 '사이코패스'는 어린시절 급격하게 미디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 괴상했는데 겉으로는 우리와 다르지 않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와 달랐다. 그들에게는 '이성'과 '감성' 중 '이성'과 '본능'만 남기고 '감성'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았다. 그들은 감정도 없고 죄책감이나 후회도 없다. 감정에 공감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 괴기할 정도로 이상한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기까지 한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매체에서 이런 사이코패스를 다루기도 한다. 소설 '아몬드', 미국 드라마 '덱스트', 영화 '추격자'라던지, '악마를 보았다.'를 보면 그들은 공포스러워야 할 상황에 되려 침착하고 되려 냉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성적 판단과 본능적 감각, 강약에 대한 인식과 정복욕 등이 있을 뿐이다.
소설 이방인의 무감정은 '어머니의 죽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여자친구인 마리와의 관계에서도 무감정을 일관한다. 아랍인을 살해하고도 무감정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무감정할 뿐이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무감정자'의 독백을 하나 하나 꺼내 읽다보면 차분하면서도 섬뜻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악'을 바라보게 된다. 모든 일은 그럴만했고 인과관계는 명확하며 그것에는 불필요한 '감정 에너지 소모'가 없다. 그저 무향무취무색의 흑백화면을 동공에 힘을 풀고 지켜보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어찌나 자유로워 보이던지, 어떤 경우에는 모든 것을 '초탈'한 성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행동에 '비겁하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정당화를 하지도 않는다. 다만 범인과 다르게 보여지는 이것으로 그를 '성인'이라 볼 수는 없다. 그와 성인의 커다란 차이라면 '무감정'에 '비도덕성'이 함께 하는가다.
우리를 이끌던 성인들은 '감정'에 휘둘려 대의를 놓치지 않았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참착함을 유지하며 꽤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 보았다.
십자가에 못 밖히던 예수의 '주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들은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처럼 자신의 목숨조차 초월한 침착함과는 다른다.
하나는 무감정과 비도덕이고 하나는 절제와 도덕이다. 무감정과 비도덕의 핵심은 '지극한 이기심'에 있다. 극단적인 자기 중심적 사고와 행동이다. 아이러나하게 이 대척점에 '절제와 도덕'이 있다. '절제와 도덕'은 지극한 이타심'에 그 뿌리를 갖고 있으며 초자기적인 사고와 행동을 갖는다. 이런 양극단이 겉으로 보기에 유사한 이유는 '유다'와 '예수'의 모델을 함께 썼던 '다빈치'의 일화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극단적인 빛과 극단적인 어둠은 모두 앞을 보지 못하게 한다. 두 공통점은 양극단이 결국 하나와 닮았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중도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한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자칫 '뭐 그럴 수도 있지.'하고 스치고 지나가는 흐름에 자연스럽게 따라가 버리기도 한다. 어쨌건 사회적 규범을 무시한 채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살던 주인공이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사실 사이코패스는 생각보다 흔하다. 우리가 100명을 알고 있다면 그들 중 한 명은 사이코패스다. 통계적으로 볼 때, 한 번도 그런 유형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이 그런 유형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사이코패스이거나 혹은 살면서 수명의 그들을 만난다. 우리는 그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판단할 수 없으며,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저 문제 없이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떤 사건에 의해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이방인을 격리하고 처치하고자 한다. 그들이 우리와 다르고 피해를 끼치기 때문일수 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다고 반드시 격리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잘 섞여 일상을 살아가기도 하고 여느 드라마와 영화처럼 특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로 사회적 이득을 주기도 한다. 산술적으로 대한민국 5천만 국민중 50만은 사이코패스다. 이들을 모두 격리하고 처단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노사이드'라 할 수 있다. 인종청소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에 '혐오'와 '불신', '공포'는 악을 처단한다는 목적으로 또다른 악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