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인환 May 24. 2024

[고전] 균형과 질서에 대해서_대학 중용

 '대학중용'은 '대학'과 '중용'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먼저, '대학'은 말한다. 개인 수양이 가정과 국가를 이어서 천하 평화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개인의 도덕적 수양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격을 만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 평화의 기본이 된다는 '이상'을 제시한다. 질서과 체계, 규칙과 정리라는 명확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공자의 '유교'를 잘 보여준다.

 공자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정리', '질서', '체계', '규칙'이다. 태양은 태양의 자리를 지키고, 달은 달의 자리를 치키고, 나무는 나무의 자리를, 풀은 풀의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알고 지켜야 한다.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이 고리타분해 보이는 이천년 넘은 꼰대어는 소통이 안되는 '권위주의 사고방식'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에게 '유교'는 '꼰대'의 철학이다. '질서'를 강조하는 쪽이 '위'라는 점이 이유다. 사람의 욕심이 한이 없는지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선택적 철학이 가장 '유교'를 위험하게 만드는 자세다.

 '유교'의 핵심은 '너'가 아니라 '나'다.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하지, 상대가 상대의 위치에 최선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 '위치'에 오른 이들이 난데없이 "너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라." 하니, 그것은 '유교'를 빙자한 '간섭'이 된다.

 대부분의 철학은 '남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라, 스스로를 '수양'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 '너'는 없다.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공자의 가르침을 보면 각자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다만 오늘 그 '성인'을 방패막이로 삼는 '공자팔이'는 공자말을 앞세워 말한다. 

 "너의 본분을 다하라."

 사실 유교 철학의 핵심은 모두가 각자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둘이 있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하나 있다.

 "왜 나만 해?"

 이 유치하고 철없는 생각은 그대로 성장하여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예순이 된다. 자신만하기에 '손해' 본다고 생각한 이들이 '다른 이들의 철학'을 고쳐 놓으려고 간섭하기 시작한다.

 상대는 하던 말던 자신은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간섭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임금'이 '임금'의 위치를 다하지 못하더라도 '신하'는 '신하'의 역할을 하고,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못하더라도 '아들'은 '아들'의 역할을 해야 한다.

 상대는 하지 않는데 '나만' 한다고 손해라고 여길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수신'은 모든 덕목의 기본이다. 이렇게 자신의 수양에 힘쓴 이들이 많아지면 사회는 점차 자리를 잡는다. 부처를 팔고 예수를 팔고, 공자를 파는 것처럼 자신의 말에 위엄이 없는 자들은 성인을 힘을 빌어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니 결국 '제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스승'을 욕보인다.

 다음으로, 중용은 무엇인가. 중용은 '유교와 도교'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적절한 중간을 말한다. 모든 행동과 사고는 중도를 지켜야 한다. 도덕적 행위와 인간관계의 가르침도 준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이 말은 '지나칠 것 같으면 차라리 모자른 편이 낫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화'를 위해서는 다다익선이 맞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단'은 꼭 화를 부른다. 즉 선을 넘지 않는 조화로움은 '질서' 만큼이나 중요하다. 달이 달의 위치에 떠 있는 이유는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과 지구로 부터 튕겨 나가는 관성 사이의 균형 때문이다.

 즉, 대학과 중용은 사실 우주를 이루는 방식이다. '균형'은 '질서'를 낳고, '질서'는 '균형'을 낳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 둘이 너무 붙어 '충돌'하지 않고, 너무 멀어 '튕겨져' 나가지 않는 적절한 선의 균형이 필요하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만 그렇겠는가.

군자지교 담담여수(君子之交淡淡如水), 군자의 사귐은 맑은 물과 같아서 담백하고 평온해야 한다. 군자의 우정이 욕심 없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소인지교 감감여주(小人之交甘甘如酒), 소인의 사귐은 달콤한 술과 같아서, 진하고 강렬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소인의 우정이 이해관계에 얽혀 있고 일시적이라는 의미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함께 여행하거나 동거를 하게 되면 꼭 싸우게 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살다보면 그 흠을 보게되고 싸우게 된다. 즉 너무 가까워지면 결국 '화'를 면치 못한다. 모든 관계는 '대학'과 '중용'처럼 질서와 균형이 중요하다.

다시보자면

공자의 철학의 핵심은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예수의 철학도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부처의 철학도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도덕'과 '윤리'의 잣대는 '너'가 아니라 '나'에 두어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원수'가 해서는 안된다.

'깨닮음'에 이르러라, 라는 말은 '상대'가 아니라 '나'에게 두어야 한다.

공자의 수양, 예수의 사랑, 부처의 깨닮음.

그 가르침을 우리는 때로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가. 그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향하는 무기여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 폭력이 반드시 나쁘다는 착각_안데르센, 잔혹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