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Really, Really you want? Then that's okay."
피비의 대사다. 그냥 별의미 없이 지나간다. 배경으로 약간의 웃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특별한 설명도 없다.
앞뒤 상황을 말하면 이렇다. 친구인 '조이'는 연기 수업을 진행한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에게 복서 배역의 오디션 기회가 온다. '조이'는 정작 자신이 그 배역을 맡고 싶어 한다. 욕심에 '조이'는 학생에게 '동성애자 복서' 역할을 지시한다. 학생을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으로 지시한 내용이다.
이때, 자신을 자책하던 '조이'에게 친구 '피비'가 말한다.
“If you really really wanted it, then it’s okay!
"진짜 진짜, 원했으면 됐어, 괜찮아."
정황상 '괜찮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친구, 피비는 말한다. '진짜 진짜, 원했으면 됐어, 괜찮아."
괜찮다라는 '위로'를 끄집어내는 전개 방식이 너무나 단순 명료하다.
진짜 진짜, 원했으면 괜찮다니...
스치고 지나가는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영상을 본 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그 장면이 계속 머리에 남았다. 가만히 물어보자. 어떤 논리와 책임, 의무를 배제하고 '정말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 그것은 가슴이 시키는 일인가, 혹은 머리에서 결정한 내용인가.
주인공는 일상을 피해 휴식을 취한다. 도중 숲속 노부인을 만난다. 노부인은 네가지 인생 질문을 한다. 완전히 소진되어 번아웃 된 주인공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
'정말 내가 원한 것인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1년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정말 지금처럼 계속 살고 싶은가'
네 가지 질문에 공통점은 '정말 그러한가'하는 물음이다. 가슴과 다른 해답을 가지고 있는가. 단순하다. 내린 결정이 '정말' 그러한가, 하고 되묻는다. 단 한번의 되물음으로 우리는 제길을 찾는다. 선택은 대체로 '이성'을 따를 때 합리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합리적인 선택'만 하고 살겠는가. 때로는 합리적이지 않아도 '선택'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우리의 인생을 채워가는 '합리적인 선택'은 점점 비중을 늘리다가, 어느 순간 맞지 않는 옷을 벗어 던지듯 던져 진다. 즉, 어차피 이성적인 판단으로 한참을 진행하다가 되돌아 올 것이라면 처음부터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회가 정형화 되면서 합리적인 판단은 '해답'처럼 되어간다. 사회가 만들어낸 정답은 마음과 반대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합리성'에 따라 계속해서 진행된다. 그렇게 발생하는 것이 '인지부조화'다. 우리 삶에 '진심'이 사라지고 '합리성'만 남는 경우다.
어린이의 선택은 꽤 진실하다. 별것 아닌 것에도 골똘한다. 모든 선택을 처음 내려보는 것이며 그 본질에 대해 신중히 접근한다. 다만 어른들의 선택은 '진실하지 못하다.' 어른들은 과거에 대략적인 선택을 내린 바가 있으며 그 데이터를 근거로 대체적인 '합리적 판단'을 내린다. 즉, 진실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데이터에 따른 '득실'을 따져 들게 된다. 고로 우리의 판단은 거의 자동적이다. 우리는 선택하길 싫어한다. 골똘해 하지 않기 위해, 어떤 순간에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결정 지어 놓는다.
'짜장과 짬뽕' 중 어떤 것을 골라야 하는지,
'파랑과 빨강'중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오른쪽과 왼쪽' 중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
대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정해져 있고, 과거에 만든 가이드라인에 따라 그저 움직일 뿐이다. 우리는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선택이라는 건 굉장한 특권이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피로감으로 쌓인다. 선택은 '자유'라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근현대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고로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억압'이나 '억제'로 보인다. 부정적인 단어다. 그렇다면 선택이 제한된다는 것은 꼭 나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때로 선택은 '피로도'를 쌓게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한다.
'선택 피로도'가 쌓이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아침부터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일을 할지 정해지지 않은 이들이 있다. 이들은 '선택'에 대한 '자유도'가 높다. 다만 그만큼 '선택 피로도'도 함께 높아진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선택피로'에 관한 말을 했다. 그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선택의 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사람은 너무 많은 선택을 할 때 피로를 느낀다. 이런 피로는 나중에 있을 중요한 문제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왜 항상 회색 티셔츠만 입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이와 같이 답했다.
"나는 가능한 한 적은 결정을 내립니다. 내 삶을 단순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같은 옷을 여러 벌 가지고 있어요. 매일 아침 무슨 옷을 입을지 결정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선택을 위해 '선택'을 제어한다. 우리에게는 유한한 에너지가 있다. 한정된 에너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선택한다. 고로 더 좋은 선택을 위해, '선택'을 줄이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자유란 필연적으로 불안과 고독을 동반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지배받고 복종하는 것을 통해 도피하고 싶어하는 이유다."
생각보다 우리는 '자유'보다 '복종'을 택한다. 주체적인 의지를 갖고 행하는 것보다 정해준데로 움직이는 일을 선호한다.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정신적 에너지를 덜 소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내려진 해답대로 살아간다. 그것이 편하고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위험 부담도 적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지부조화'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 되물어야 한다.
“you really really want?
정말 정말 원하는가?
Then that's okay.
그러면 괜찮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