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 것도 없다. 과거만 해도 사회는 함께, 아이를 '양육' 했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작은 아버지댁'에서 자랐다. 학교를 마치면 '작은아버지댁'에서 저녁식사를 했고 해가 질 때까지 놀다가 어두워지면 어머니가 데리러 오셨다. 이 기간은 꽤 길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 거의 일상이 그랬던 듯 하다. 농사일이 바쁘셨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그랬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아이를 내 생계를 위해 '동생의 집'에 맡길 수는 없다. 사회는 꽤 파편화 됐고 개인화 됐다. 어쩌면 흔히 말하는 '뺑뺑이 돌리기'에 적합한 학원을 알아보는 편이 맞을 지 모른다.
그렇다면 학원은 아이를 '양육'할까. 아니다. 친척은 아이에게 '양육자'이지만, 학원 입장에서는 '고객'이다. 즉 아이는 '소비자'로써 서비스를 이용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 사촌형은 한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다. '한자교실'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명확하진 않다. 다만 한자교실은 '노인회관'에서 했다. 매주 1회 한자를 공부하곤 했다. 한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와 간단한 명심보감이나 논어의 한문장을 공부했던 듯 하다.
당시 나와 동생은 다른 사촌들을 데리고 '한자교실'을 다녔다. 교육비는 따로 없었다. 어른들은 각자 시간이 되는데로 자가용을 이용하여 노인회관과 집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곤 했다. 그게 당연한 사회였다. 키즈카페가 아니라 사촌네가 놀이터였다. 학교 또한 다른 의미의 교육을 했다.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니라 사회성과 예절을 배울 수 있었다. 얼마나 잘 가르치냐보다 얼마나 존경할 수 있는지가 좋은 선생님의 기준이었다.
사회가 도시화 되면서 많이 달라졌다. 아이를 옆집에 맡기거나 친척에 맡기는 것은 꽤 염치없는 행동이 됐다. 한 두번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이를 길러내는 '양육'의 관점에서 장기적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아이는 대체로 '양육'되지 않고 '서비스 소비자'로써 존재를 갖는다. 서비스 소비자는 '갑'의 입장에 서 있다. 언제나 선택하고 평가하게 된다.
'어떤 학원보다는 어떤 학원이 낫다.'
'어떤 선생님보다는 어떤 선생님이 낫다.'
평가하는 입장에서 길러지는 아이에게 '교육'은 어떤 의미일까. 양육과 교육은 기본적으로 '동경'과 '존경'을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닮고 싶다는 내부적인 존경이 없이 아이는 길을 잃는다.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최소한의 모델이 있어야 아이는 올바른 정체성을 형성하며 나아간다.
도시의 양육자들은 아이를 '양육'한다기 보다 길러낸다.
길러낸다. 교육하고 성장시키고 길러낸다. 이것은 물론 사전적 의미의 양육이지만 인류 보편적으로 사람을 길러내는 방식과 크게 다르다. 우리는 소와 돼지, 양을 길러낸다. 키우고 성장시킨다. 때로는 훈련견을 교육한다. 다만 이런 행동에 '양육'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서적, 정신적 성장을 돕는 것에 '양육'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서비스를 이용하다보면 우리는 묻는다.
'선생님 어땠어? 바꿀까? 마음에 들어?'
마치 옷이나 신발을 고르듯 '스승'을 취사선택하고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스승'을 평가한다. 사회가 분업화되며 당연히 '육아 서비스'도 분업 대상 중 하나다. 아이를 길러주는 보모와 유치원, 키즈카페, 학원 등은 서비스업으로 치열하게 경쟁한다. 고객을 모시기 위한 싸움에서 '친절', '평가'는 필수다. 아이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서비스업체'에 좋은 관점을 가지기 힘들다. 실수는 당연히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봐야만 하는 문제일까.
우리는 아이를 '애완'으로 길러내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반려동물'로 사용하는 말이 과거 '애완동물'로 사용됐다. 보기 좋고 사랑을 주는 대상으로써의 장난감처럼 여기는 것이다. 현재의 육아 또한 '애완'의 의미로 많이 바뀌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머리를 하고 좋은 교육 서비스를 받게 하고 있진 않은가. 표면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들을 선택 함으로써 우리는 점점 '육아'를 '선택적 소비 활동'으로 여기고, 취향껏 원하는 이들이 골라 하는 '행위'로 보고 있다. 어쩌면 '산업화의 끝'은 저출산, 저소비, 저공감이지 않을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