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창한 오후, 파블로 피카소는 파리의 유명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그는 스케치북을 펴고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한 여성이 다가왔다. 그녀는 파카소에게 자신도 그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피카소는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곤 즉석에서 스케치를 완성했다. 여성은 물었다.
"정말 멋지네요! 얼마인가요?"
피카소가 답했다.
"1만 프랑입니다."
여성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몇 분만에 뚝딱 그린 그림이 1만 프랑이라니, 너무 바싼거 아닌가요?"
피카소는 답했다.
"몇분이라뇨? 저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40년이 걸렸습니다."
여성은 그 그림에 1만 프랑을 지불했다.
가치라는 것은 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가치는 쌓여지는 것이며 한 번 쌓여진 가치는 사라지지 않고 무한 복제된다.
그림에 문외한 이가 40년을 그린 그림보다 피카소의 몇분짜리 그림이 더 가치가 있는 이유는 피카소가 만들어낸 40년의 가치 때문이다. 실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한다. 그것은 치명적인 오류를 만들어낸다. 쉽게 달성한다는 착각을 만들어낸다. 손흥민 선수나 페이커의 연봉과 명성, 화려한 스타의 삶을 사는 이들을 부러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거저 얻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결과를 평등하게 두고 해석하면 많은 것은 평등해지겠으나 과정에서의 불평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와 비슷한 예는 더 있다.
옛날 두 농부가 있었다. 그들은 매년 찾아오는 가뭄을 대비해야 했다. 한 농부는 매일 강가로 가 양동이로 물을 길러왔고 다른 농부는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물을 길러오던 농부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성실한 농부'라고 불렀다.
반면 다른 농부는 여전히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게으른 농부'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성실한 농부의 저수지가 절반정도 찼을 때, '게으른 농부'는 드디어 집밖으로 '대롱'을 들고 나왔다. 마을은 가물기 시작했고 '성실한 농부'는 저수지의 물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다. 사람들은 '게으른 농부'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만들어 온 대롱을 길게 이어 강에서 저수지까지 수로를 놓았다. 시간이 더 지나고 '성실한 농부'의 저수지가 바닥이 났을 때에도, 가난한 농부의 저수지에서는 마르지 않는 물이 수로를 통해 펑펑 나오고 있었다.
손흥민 선수가 십대에 빈 운동장에서 공을 찬 행위와 BTS가 늦은 밤, 연습실에서 거울을 보고 한 행위는 1원도 만들어주지 않았지만 지금 그들이 빈 종이에 휘적인 친필 싸인은 수십 만원에 이른다.
학생의 치열함은 당장 아무런 득실을 주지 않지만 평생의 득실에 기여한다. 준비생의 치열함도 당장은 아무런 이득이 없지만 자신의 가치를 결정한다. 연습생, 무명인의 어떤 행동도 그 자체에는 가치가 없지만 엄청난 가치를 쌓고 있는 중이다.
내면적 가치가 한번 쌓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기회'를 가져오는 '수로'가 되어 무한대로 생성할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들은 외면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충분한 내면적 숙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외면'은 '내면'의 반영일 뿐이며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길러야 하는 이유는 그렇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은 우리 힘으로 다스릴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외부와 현상을 두고 지금 막막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형성하고 미래에 무한으로 복제될 힘을 준비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