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평선 작가의 수필, '꽃길이 따로 있나, 내 삶이 꽃인 것을'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봄꽃 뷔페를 차려 놓은 것 같다.'
어디 봄꽃 뿐이던가, 삶이 차려 놓은 식단은 너무 많다. 그 뷔페 식탁에 앉아, 김밥 정도만 먹어도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아깝지 않은가. 공짜로 차려놓은 그 식탁에 앉아 익숙한 것만 골라 먹는 삶은 말이다. 적어도 이것도, 저것도 한 번씩은 찍어 먹어봐야 하지 않을까.
다양하게 집어 먹다보면, '신맛', '단맛', '짠맛', '매운맛'이 골고루 느껴진다. 많은 음식을 찍어봐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같은 메뉴 앞에서, 다음에는 어떤 걸 더 많이 퍼담아야 할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영원히 배가 불지 않는 뷔페에 앉아, 고작 한가지 음식만 골라 먹기에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치고 살고 있는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걸 알아야, 다른 누군가에게 추천도 해 줄 수 있다. 맛 없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아야, 다른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스스로를 알고 조심할 수 있다. 상대적 가치도 알 수 있다.
어둠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맛없는 것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맛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바빠 보지 못한 사람은 여유로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상대적인 크기라는 것은 기준점을 세운 곳부터 몇 걸음을 걸어 나갔는지로 키워진다. 마이너스 100에서 마이너스 30으로 나아가는 것은 100만 1에서 100만 2로 나아간 것 보다 더 큰 행복을 갖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그 기준점이 가장 바닥과 가까울수록, 그 비교대상이 확실하게 대비될수록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우리 삶에 차려진 다양한 뷔페식 중 어떤 것을 먹어도 고로 그것은 '행복'을 위해 도움이 된다. 맛없는 것을 먹어도, 맛 있는 것을 먹어도...
일본 경영의신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이렇게 말했다.
"감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은 세상과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불평하느냐, 감사하느냐 일뿐이다. 감옥이라도 감사하면 수도원이 될 수 있다."
해골물을 퍼마셔도 그것이 달고 맛있는 이유는 실제 그 물이 달기 때문이 아니라, 간밤에 너무 목이 말라 정신없이 들이켰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항상 컵에 물이 반이나 차 있는 삶을 살고 싶고,
그럼에도 죽지 않는 삶을 살고 싶고,
차라리 잘 된 삶을 살고 싶다.
오히려 좋은 삶을 살고 싶고,
그나마 다행인 삶을 살고 싶다.
누군가의 말에
'그거 좋은 생각이야!'라고 말하고 싶고
'해볼만 한데?'라고 말하고 싶고
'그만한게 어디야'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보니,
딱 말하는대로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는대로 말하게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