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하게 웃는 그 사람이, 당신보다 더 슬퍼해 본 적 없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머리가 더부룩한 것이 체한듯 하다. 정보가 원활히 소화되지 못하고 혈관 어딘가에 꽉 막혀 다음 정보의 갈길을 막아선 느낌이다.
언젠가 TV를 보는데 '에픽하이'의 '타블로' 님이 말했다. 나이가 드니 막상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 '넷플릭스'도 보고, '게임'도 할 것 같은데, 그냥 '멍'하게 있게 된단다.
그말이 찰떡같이 공감됐다.
어린 시절에는 체기가 많았다. 무얼 먹으면 금방 체하곤 했다. 애당초 소화기관이 약한 탓이다. 모든 사람이 강한 능력과 약한 능력이 있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소화기관'이 약했다. 음식물을 소화하는 능력처럼 정보를 소화하는 능력도 분명 타고남이 있을 것이다. 그 선천적인 능력은 역시 훈련으로 강화되지 않는다. 대체로 후천적 노력은 '훈련'이 되기보다 '병'을 만들기도 한다.
예전에 '가짜 사나이'라는 컨텐츠가 있었다. 1편만 보고 거의 보지 않았다. 이유는 이렇다. '정신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폭언과 인신모독이 난무해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정신력'은 그런 방식으로 단련되는 것이 아니다. 반복되고 지속되면 '훈련'이 되고, '능숙'해지면 '성장'하게 된다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모든 영역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어떤 능력은 '소모품'처럼 사용될수록 '퇴화'한다.
'소화기관'이 약한 사람이 오랜기간 '먹는 일'을 지속한다면 위병에 걸릴 것이다. 우리의 뼈와 뼈를 잇는 연골 또한 소모품이라 자주 사용하면 단련되는 것이 아니라 '소모되어 사라진다'고 한다. 이는 어떤 방식을 해서도 다시 재생되지 안흔ㄴ다.
세상에 '노력'이 모든 해답이라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어떤 '노력'은 해답이 아니다. '열심히' 했다고 모두가 '아인슈타인', '빌게이츠', '모짜르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손웅정 감독은 어린시절 손흥민 선수에게 '공을 차는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어떤 신체 기관은 분명 자주 사용할수록 '소모'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속적 폭언과 인신모독은 인간의 정신력을 더 강하게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 결여와 자기비하로의 신경회로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고로 '정신력 강화'를 위해 굳이 자신을 비관적인 환경에 노출 시킬 필요는 없다.
정신력을 강화를 위해서는 '쉼', '존중', '칭찬', '성취', '극복' 등의 감정이 골고루 필요하다. 그러한 것은 다다익선과 과유불급의 중간 쯤에 있어야 한다. 너무 많은 긍정적인 감정은 오만과 나태, 자만을 만들어내고 너무 적은 긍정적인 감정은 '열등감, 자기비하, 부정적 인식을 만들어낸다.
얼마간 나를 둘러싼 상황에 이렇게 되뇌였다.
'신은 극복 가능한 시련만 주신다.'
혹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혹은
'이는 신이 나의 그릇을 시험하기 위해 주신 선물과 같은 시련이다.'
다만 다시 생각해보면 미련하게 그것을 정면 돌파할 필요는 없다.
신이 극복 가능한 시련만 주신다면 그 시련에 꺾여 좌절하고 자살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때로 나를 나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따르면 신은 인간을 시험하지 않는다.
고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되,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즐길 수 없으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예전 어떤 책에서 보건데 인간의 '명상'은 모든 문제를 현실에 두고 내면으로 도피하는 무책임한 태도라는 글을 보았다. 현실의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도 하지 않으며 내편의 평화를 얻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것이 어째서 부끄러운 일인가 싶다.
가끔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이나 흘려 보내며 멍청하게 나이만 들고 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