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불은 켜져 있고 소리는 꺼져 있다. 조용한 거실과 식탁으로 적당한 피곤을 몰고 들어온다.
찌들었다는 표현이 적당한 상태로 집으로 들어오면 빠르게 샤워 한번하고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고 싶어진다.
적당히 어질러진 흔적들 사이로 색종이 편지가 보인다. 요즘 글을 한창 배우고 쓰느라 이런 편지를 종종 받게 된다.
'하율이'와 '다율이'의 편지다.
편지를 뜯기 전 방문을 열어보면 가벼운 잠옷 차림으로 대자로 뻗어 자고 있다. 편지를 뜯어보면 각자 개성이 묻은 글이 적혀 있다.
아직은 여덟살이라 간질거리는 감성을 느낄 만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도 아마 아빠를 가장 멀리하고 싶은 사람으로 두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아이랑 자전거를 타는데 문뜩 자전거방 아저씨가 한 말씀이 떠올랐다.
"아저씨, 아이들 자전거에 붙은 보조 바퀴는 언제 떼어주면 되나요?"
넘어지지 않게 보조해주는 바퀴 두 개가 있는 네발 자전거를 보고 내가 말했다. 아저씨는 웃으시며 답하셨다.
"조금 타게 두시면 아이들이 불편해서 떼어달라고 할 거에요."
아저씨의 말씀은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스스로 먼저 떼어달라고 말할 것이란다. 보조바퀴의 역할은 처음에 넘어지지 않게는 해주지만 능숙해지는 순간부터는 '속도'른 내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신다.
어쩐지 언제 떼는지는 굳이 정해주지 않아도 된단다.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고마운 장치가 언젠가는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은 내가 부모님께도 가졌을 감정이다.
부모님은 내가 성인이 됐을 때부터, '공무원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말씀하셨다. 오죽하면 유학 중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지금이라도 돌아와서 공무원 시험 준비해라'고 하셨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좋고 나쁨을 떠나, 그 직업 특성이 나에게 맞지 않았다. 가장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잘하면 잘한만큼 성장하고, 못하면 못한만큼 깨지는 일을 하고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차라리' 영업처럼 성과에 치열한 삶을 동경했다.
꽤 완강하신 부모님은 실제로 성인이 된 후의 나의 선택을 탐탁치 않아 하셨다. 어린 시절에는 든든한 '조력자'셨지만 성인이 된 후부터는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맞지 않는 옷을 입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스물이 넘으면 독립을 해야 한다. 나는 스물에 군대를 갔고 이후에는 유학을 떠났다. 점차 부모님이 사시던 곳과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게 되면서 순종적인 아들로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 옳지 못하다고 결론 지었다.
순종적인 아들이되는가, 혼자 우뚝 선 아들이 되는가.
그 딜레마를 한참 고민했다. 그 중간 지점이 없다.
그것을 알고 순종적인 아들의 길을 접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과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나의 보호가 답답하다 느끼는 순간이 올 것이다. 빠르면 3년? 4년? 늦어도 10년 안에는 찾아오지 않을까.
그것을 '사춘기'라고 부르지만 그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 것도 서로에게 불행이다. 독립하지 못하는 자식과 집착을 놓지 못하는 부모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은 결국 자녀는 나아가지 못하고 부모는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나의 역할은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잠시 지탱해 주다가, 아이가 달려나가는데 거추장스러워지면 그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자전거에게서 보조바퀴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나지만, 생각해보자면 그 바퀴는 다시 여러 방면에 쓰인다. 관계란 상대적인 것이라 어떤 것에 불필요해져도 다시 어떤 것에 필수적일 때가 있다. 그렇게 잠시 서로에게 필요한 무언가가 되었다가 서로 다른 무언가에 필수적인 무언가가 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