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외부의 것들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다. 동시에 스토아 학파 철학자다. 그가 통치하던 로마는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 말년에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으로 제국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어려움 속에서 그는 황제의 의무를 다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쓴 '명상록'에는 '외부의 평가나 물질적 풍요로움'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를 보는 일을 강조한다. 실제로 명상록 자체가 누군가를 위해 썼다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쓴 글의 모음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삶에 대한 접근 방법이 극명히 다르다. '개츠비'는 외부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자 했다. '청교도'가 세운 국가에서 '물질'의 풍요가 주는 가치는 중요했다. 신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청교도인들은 절제와 성실, 금욕과 같은 덕목을 강조하는 경건한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다만 이런 청교도적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성공'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이후 경제적 성공이 내면적 가치를 넘어서는 지경에 이른다.
청교도의 신념에는 '소명의식'과 '세속적 성공의 표지'라는 개념이 있다. 이들은 '부유함'은 하늘이 주신 사명으로 보았다.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은 신앙적 가치와 일치한다고 봤다. 고로 경제적 성공은 '신'이 준 축복으로 해석하면서 '부유함'이 도덕적 타락이나 탐욕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즉 청교도에서 '풍요'는 내면에서 차고 넘쳐 외면으로 현상이 발현되는 일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여지는 '외면'만이 주목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인지부조화' 같은 혼란을 겪는다. 본질을 잃고 '물질적 풍요'에만 집중하는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를 '위대한 개츠비'는 보여준다.
개츠비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사회적 성공과 부를 강조한다. 당시 그에게 이는 사랑과 인정을 얻는 꽤 그럴싸한 방법이었다.
화려한 저택, 사치스러운 파티는 자신을 포장하는 수단이다. '개츠비'는 이러한 '겉포장'이 '본질'에 닿을 것이라 여겼다. 데이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결국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하고 공허하게 만든다. 그것이 소설의 핵심이다.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가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내면의 안정과 자아의 충실함을 외부적인 인정이나 물질적 성공보다 더 강조했다. 그는 스스로가 황제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자신을 더 성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면에서 개츠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멀리서 보기에 완벽한, 그러나 가까이 보기에 공허한,
꽤 그럴싸한 모습을 보이며 사는 삶.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대의 우리는 앞서 말한 '청교도'의 이념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웠던 철학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 또한 유교가 만들어 둔 틀에서 '미국'이 발전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적당히 섞으며 살아간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는 처음에는 완벽해 보였다. 그녀는 우아했고 상류층의 품격을 갖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개츠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부와 명성을 쌓는다. 비로소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개츠비'라고 브리기도 한다. 다만 데이지와의 만남이 현실로 다가갈수록 그는 점점 그가 사랑했던 실체가 아니라 허상을 깨닫는다.
데이지는 '인격'으로써 한 여인일지 모른다. 다만 비교해 보건데, 우리가 어쩌면 '세속적 성공' 뒤에 얻게 될지 모른다는 '본질'을 닮았다. '세속적 성공'을 얻고나면 우리는 '그것'에 조금 더 가까워 질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다만 실제 '성공'에 이르면 우리는 '허망함과 공허함'을 느낀다.
멀리서 보기에 완벽한 그것들은 가까이에 다가갈수록 허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현대 SNS를 보고도 느낀다. 개츠비가 그의 전 재산을 걸고서라도 데이지와 진정한 사랑을 하고자 했던 것 처럼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만족감을 위해 하는 행위일 뿐이다.
한 사람의 성공이나 행복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장식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 내재된 의미와 가치를 통해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 '외면을 채울 것이 아니라, 차고 흘러 넘쳐서 외면조차 가득 메우는 내면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