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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Dec 20. 2024

[계발] 읽기는 식사와 같고 쓰기는 배설과 같다_글쓰기

글을 읽다가 어떤 글은 '육성'으로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문장이 그랬다.

 '생각할 거리가 없으면 글을 읽고, 생각할 거리가 많으면 글을 써라'

 머리가 텅 빈 것 같을 때에는 글을 읽어, 생각 거리를 채워두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글로써 해소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읽는 행위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고 쓰는 행위는 배설하는 행위와 같다. 나의 블로그 명칭이 '해우소'인 이유는 '온갖 배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배설의 행위는 '걱정'과 '근심', '불안', '다짐', '계획', '일상', '정리' 등 다양한 내용들이 있다.

 원래 모든 것이 그렇다. 모두가 고귀한 척하고 살아도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배설물을 먹고 산다. 우리가 먹는 식물은 흙 속의 양분을 빨아들여 자란다. 그 양분은 지렁이와 같은 미물의 배설에서 시작한다. 질소, 인, 칼륨과 같은 식물에게 필수적인 영양소는 이처럼 지렁이의 배설에서 비롯되고 산소조차 이 식물이 내뿜는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호흡하고 먹는 것이 '동물'이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섭취한다.

 순환은 끝이 없다. 죽은 동물과 식물의 잔해는 또다른 생명의 양식이되고, 우리가 배설한 모든 것도 누군가의 생명을 키운다. 우리가 마시는 물조차 한때 누군가의 몸을 지나간 흔적이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다. 고귀함이란 고로 착각이다. 깨끗함이란 것도 착각이다. 우리는 결국 배설의 순환 위에 서 있을 뿐이며 먹고 싸고 먹고싸는 순환의 일부일 뿐이다.

 글을 읽고 쓰는 행위는 이런 먹고 싸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로 많이 먹으면 많이 쓸 수 있고, 많이 쓰면 많이 읽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독서파만관 하필유여신'이라고 했다. 이는 책 만권을 읽고 붓을 들면 신들린 듯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 글을 쓰면 큰 걱정 없이 장문의 글이 쏟아져 나온다. 일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물이 고통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는 '창작하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속 창작'에서 비롯된다. 머리가 복잡할 때 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펜과 종이로 그것을 받아내면 꽤 괜찮은 창작물들이 된다. 고로 많이 읽으면 많이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읽기만 한다고 저절로 양질의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책을 읽을 때, 조금더 능률이 높은 방식으로 책을 읽는 나만의 방식이 하나 있다. 바로 '쓸 것'을 염두하고 읽는 것이다. 그저 흘려 보내듯 읽는 습관은 음식을 흘리며 먹는 것과 같다. 음식을 소화하지 않으면 배설할 수 없다. 고로 음식을 소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쓸 거리'를 염두하며 읽는 것이다. 글을 읽다고 좋은 문구를 찾아간다. 실제로 나의 글 중 일부는 '인용구'로 도입을 시작한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구가 나오면 그 문장으로 운을 뗀다. 이후 문구에 대한 나의 생각을 쏟아낸다. 그러다보면 '책 저자'의 바톤을 이어 받아 함께 추가 창작해내는 듯한 생각에 빠진다. 그렇다보면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연결 시켜 볼 수 있다.

 어떤 책의 경우에는 저자와 생각이 다른 경우도 많다. 다독을 하다보면 생각이 다른 저자들의 글을 읽게 되는데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만의 철학이 만들어진다. 즉 양쪽의 논리를 모두 읽어보고 더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쪽의 방향으로 사고가 정리된다.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철학이 만들어지면 다음 도서를 읽을 때는 그 철학을 기반으로 작가의 생각과 비교해가며 읽을 수 있다. 고로 어떤 경우에는 옳다가, 어떤 경우에는 그르다는 모순적인 관점이 만들어진다.

 환경 문제에 관한 관점도 그렇다. 환경에 대해 우려하는 관점의 책을 읽고, 이후에는 그에 반하는 책을 읽는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책을 읽고, '보수'적인 책을 읽는다. 그러다보면 글의 리뷰가 왔다갔다 하며 자기논리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모순 조차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 들인다.

 세상에 '정확한 한쪽'을 취하는 것은 반드시 더 큰 모순을 만들어낸다. 이는 흔히 정치에서도 볼 수 있는 어떤 논리는 단지 '진영 논리'에 의해 '반대'하거나, '찬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 서 있는 쪽이 '보수'라고 하더라도 '진보'적인 정책에 공감할 수 있고, '진보'라고 하더라도 '보수'적인 정책에 공감할 수 있다.

 즉 모순을 피하려다보면 어차피 모순을 맞이한다. 고로 독서를 할 때는 '그럴 수 있다.'라는 마음과 '정말 그러한가'라는 두 가지 시선을 모두 가지고, 믿는 것을 의심하고 의심스러운 것 믿어보는 용기도 필요하다.

 과거 한 강의에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달 정도를 글을 쓰니,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렇다. 보통 자신의 인생을 글로 쓰면 책이 몇권이 나온다는 사람들도 실제 글을 써보면 한 권 분량을 채우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또한 글에 대한 소재가 고갈됐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을때가 매일 글쓰기 습관을 가진지 3달즈음 됐을 때다. 그럴때는 모든 것을 글감으로 보고 접근하면 좋다. 봤던 영화, 읽은 책, 겪은 이야기 등이 그렇다. 즉 많은 인풋이 많은 아웃풋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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