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각] 인생 첫 사기에 관해서_누가복음 23장 34절

by 오인환

학창시절, 회색 봉고차에서 덩치 큰 남자 어른들이 '시골학교' 앞에 서 있었다. 남자들은 학생들을 데리고 어느 공터로 갔다.


'이게 뭔 줄 아니?'


남자들은 회색 서류 봉투를 보여줬다.


'바로 다음 학기, 너희 학교 중간고사 시험지다'

'휙, 휙'

몇 번을 우리 눈 앞에서 휘둘렀다.


대략 열댓 명 되는 아이들은 공터 흙바닥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덩치 큰 남자 어른'의 말을 들었다.


"너희가 원하면 이거를 언제든 볼 수 있어."


이어, 다른 갈색 봉투를 꺼냈다.

'아저씨 말이 거짓말 같지? 자!'


남자 어른은 다른 갈색 봉투 속에 있는 A4용지 한 무더기를 꺼냈다.


"자, 한 번 봐바. 너네 지난 번 기말고사 시험지 맞지?"


A4용지 한 무더기가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아이들에게 전달됐다.


"어? 진짜네?'


아이들이 시험지를 보고 말했다.


당시 어른들이 말했다.

'세상에는 너희들이 모르는 것들이 많다. 미련하게 공부해서 성적을 올리려고 하지말라'


그들의 메시지였다. 생각해보니, 시험 기간에 친구와 3~40분은 더 걸어야 되는 도서관에 가서, 겨우 자리를 잡고, '한장, 한장', '한줄, 한줄'을 공부하는 노력이 어쩌면 '미련한 짓'처럼 느껴졌다.


'세상에나, 누군가는 저렇게 답지를 보고 공부를 하고 있었구나'


어른들은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신청서 한 부 씩' 나눠 주었다. 신청서에 부모님, 학생 정보를 적고 서명을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신청서는 다음 날 학교가는 길에 '자동차 정비센터' 근처에서 제출하면 된다고 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께 신청서를 드리자, 의심없이 정보를 적어 보내 주셨다. '이제 성적 향상은 따놓은 당상이다. 어머니가 가방에 잘 넣어 주신 신청서를 가지고 학교 근처 자동차 정비센터로 갔다.

정비센트 근처에 파란색 '포터 화물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모자를 쓴 남자 어른이 수동으로 여는 창문을 빼꼼하게 열어서 말했다.

"쓰고 왔니?"

가방에서 신청서를 꺼내자, 낚아채 듯 가져갔다.

"따로 전화를 주마."


학교에 도착하고 자리에 앉아, 멍청하게 칠판을 바라보는데 학교 전체로 방송이 울렸다.

'혹시 어제 하교 시에 모르는 남자 어른에게 신청서를 제출한 학생은 빨리 교무실로 오라는 말이었다. 사기가 의심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교무실에는 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속인다는 것, 특히 어른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결코 해 본 적 없던 나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속았던 꽤 충격적인 첫 경험이다.


'아, 작정하고 나쁜 짓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봤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남들보다 조금 쉽게 성적을 올리고 싶었던 욕심은 그 어른들과 다를바 없지 않았을까.


며칠 뒤, 신청서에 기재한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혹시 저번에 신청서 썼던 거 기억하니?, 시샘하는 사람들의 말은 듣지 말고, 혹시 지금 신청하면 특별히 너만 더 싸게 해줄게'


이미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시샘하는 사람들의 말', '특별히 너만'이라는 말에 다시 혹 했다.

"죄송합니다. 그냥 안 할래요!"

"어? 그래."


전화가 끊어졌다. 그게 벌써 25년 된 이야기다. 이후로 내 기억으로 금전적 피해를 입은 바는 없다. 사기꾼 치고는 참 깔끔한 인정이었다.


당시 그 어른들이 내 나이쯤이었더라면, 그들도 지금 노인으로 분류되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실패한 '한 건'이겠지만, 지금도 나에게는 생생한 기억이다. 그들이 오늘 '경로 우대석'에서 앉아, '어른 대우'를 받으며, 젊은이들에게 꼰대 같은 조언을 내뱉으며 살고 있을 걸 생각하면 소름끼친다.


그들은 그들이 지은 죄를 모를지인데, 과연 나는 내가 지은 죄를 알고 있을까.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 옵소서, 그들은 자기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누가복음 23장 34절'이 떠오른다.


누구를 탓하려다가...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자.

그들의 죄는 그들이 알아서 회개하라 하고, 나나 제대로 돌이켜보자.


'네게 없는 미덕을 칭찬하는 자는, 너의 가진 것을 탐하고 가지려는 자다.'

의도가 불순한 친절을 몇번 경험하고 나면, '의도 없는 친절'을 경계하게 된다. 그렇게 순수성을 잃고 꽤 냉혹한 사람으로 변해가게 된다.


담백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지 모른다.

'특별히, 기적과 같이, 만에하나, 한방, 쉽고 빠르게...'

이런 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타락하게 만드는지.., 악을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쉽고 빠른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IMG_7553.jpg?type=w580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철학]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_쇼펜하우어가 묻고 니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