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욕구'로 움직인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고, 외로우면 이성을 만나고 싶어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갖기 위해 움직인다. 이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하고 이루려고 노력한다.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다. 이를 '욕구' 혹은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원하는 것을 이루면 우리는 만족감을 늘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우리는 잠시의 기쁨을 느끼지만 다시 공허함을 느끼고 다른 '원함'을 갖게 된다.
즉, 인간은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끼고 항상 공허함을 갖는다. 결국 완전한 만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고로 삶이 끊없는 고통이라고 봤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채우는 어떻게 보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저주 받은 챗바퀴를 돌리는 삶과 같다.
우리를 소진시키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 챗바퀴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쇼펜하우어는 답했다. '의지', 즉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는 삶을 살면 된다. 다시말해서, '바람'이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움직이지말고 그저 그 자체가 의미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그냥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을 하되, 성취를 위한 무언가를 내려 놓는 것이다. 타인을 돕거나 자연을 감상하는 일은 '성취'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고로 '성취'를 목표로 하는 삶은 '고통'을 필연적으로 만들기에 '성취'라는 '욕구'를 덜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쇼펜하우어를 가장 평면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럼 니체는 어떤 사람인가.
그 또한 아주 평면적으로 설명해보자.
니체는 '삶의 방식'에 대한 정의를 부정했다. 즉, 니체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삶에 정의'가 필요했다. 대개 그 '정의'는 '신'께서 내려 주신 경우가 많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신'은 '인간'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이 많다. 정해진 법칙이 존재하며 그 법칙에서 어긋난 삶을 '오류'로 정의 했다. 니체는 '이 생각'에 의문을 품었다. 종교나 전통적인 가치가 삶에 피로도를 준다고 봤다.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
즉, 자신의 의지가 '신'이 내린 '삶의 정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초인'에 대한 언급을 했다. '초인'이란 누군가가 정해준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을 뜻한다. 가령 아무개가 '어떠한 삶을 살아라'라고 말해도 흔들림 없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택하는 사람이다. 이런 삶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나는 '고통'에 맞서라고 말한다. 고통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초인'으로 가도록 만들어주는 '주재'가 된다. 쇼펜하우어가 피해려 했던 그 '고통'이라는 '소재'를 니체는 직면해야 할 과제로 여겼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여겼다. 힘든 일을 겪을 때,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삶은 끝없는 고통이고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봤다. 고로 삶에서 '고통'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니체는 답한다.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다. 피하지 말고 부딪쳐라.
쇼펜하우어는 '행복'하기 위해,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 놓으라고 말한다.여기에 니체가 답한다. 더 강한 욕망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얼핏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 '어떤 삶을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의문은 '삶'은 '성장'보다 '행복'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는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다만 '니체' 또한 '행복'을 말한다. '니체'는 진정한 행복이란 '편안함과 즐거움'이 아니라 극복과 성장에서 얻어지는 기쁨이라고 봤다.
성취를 했을 때 얻어지는 '성취감', '자부심' 이런 것들이 진짜 행복이고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피하고 도망가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우고 도전하면서 얻어진다고 봤다.
누구의 행복론이 정답인가.
그런 것은 없다. 철학은 '답'을 내놓는 학문이 아니라 그저 '질문'을 내놓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의 답도 옳지 않고, 누구의 답고 그르지 않다. 거기에는 애초 '답'도 없고 두 철학자 또한 답을 내린 바가 없기 때문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