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어머니의 시신을 두고 살아간다.
얼핏 스릴러 소설인가 싶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명주는 시신이 최대한 부패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공기청정기, 에어컨은 기본이다. 그녀가 어머니의 사망 신고를 하지 못한 이유는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연금' 때문이다. 큰 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애당초 몸이 불편하고 가진 게 없는 '명주'에게는 그것이 살아갈 방법이자, 이유가 됐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조심한다. 집을 철저히 관리한다. 다만 점차 한계가 다가 오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냄새는 점점 짙어지고, 어머니를 찾는 불청객, 자신을 찾아오는 불청객으로 점차 위기를 느낀다.
애초에 돌봄은 생존 문제였다. 사랑이나 책임은 그들을 옭아매는 올가미 같은 것이다. 명주는 자신에게 오롯하게 떨어진 '돌봄'이라는 몫에 지쳐갔다. 치매 노인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겪을 다양한 고통이 소설속에 들어가 있다.
명주에게 '연금'은 해 준 것 없는 '국가'에게서 그나마 받을 수 있는 '보상' 같은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부정수급'이나 '도의적 책임', '윤리적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사치일 뿐이었다.
오래된 명주의 아파트 옆에는 뇌졸증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병하는 20대 청년이 산다. 20대 청년 준성은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간다. 아버지와 자신을 두고 떠나버린 '형'에 대한 '미움'과 '부러움'의 감정을 가지고 어렵게 하루 하루 살아간다. 명준과 준성은 서로 날카로워질 만큼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서로를 경계한다.
소설의 배경은 대략 이렇다.
더 언급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뒤로 이어지는 '소설'의 전개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더이상의 이야기는 분명 다음 소설을 보는 이들에게 '스포'가 될 것 같다. 이 소설은 첫 장을 읽고 '어라?' 하고, 후딱 절반을 읽고, '내일 읽어야지'했다가 궁금해서 나머지 반을 모두 읽어 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소설이 영화화되면 아마 꼭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에는 인기 있는 '가수'들의 실명과 노래가사가 나온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 노래할 것 없이 K문화가 대개인 와중에 혹자들은 다음 물결이 '문학'에도 올 것이라 말한다.
분명하건데 외국 소설을 보면, 툭툭 뱉어지는 어떤 사건이나, 배우, 가수, 노래 들에 '주석'이나 '각주'가 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걸 읽을 때면 웬지 모를 소외감과 섭섭함이 든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다른 외국 소설보다 더 흥미로우며 그 '주석'이나 '각주'없이 감각으로 명사를 받아 들일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 소설이 더 흥하게 되면 외국 독자들이 그 주석과 각주들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은 '돌봄'을 개인의 몫으로만 떠넘기는 사회 속에서, 버틸 수 밖에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문미순 작가'는 명주의 선택을 보여줄 뿐, 옳고 그름을 단정하지 않는다.
우리 독자도 읽으며 그녀를 욕할 수는 없다. 상황이 만들어내는 설득력에 고개를 끄덕이며 저절로 도덕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경계선을 쉽게 넘어서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사회에서 보도되는 '50대 여성, 친모 연금 수령 목적 시체유기'와 같은 잔혹한 범죄 뒤에는 얼마나 많은 '사회적, 개인적' 이야기들이 숨어 있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온 현실을 비춘다. 그리고 그것은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