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안다'고 해보자.
'모든 지식은 직접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우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경험'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경험'에 앞서는 기본적인 틀이 존재한다. 이것을 '선험'이라고 한다.
경험을 하기 전에 이미 머리속에 있는 것. 그것을 이용하면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앎을 얻을 수 있다.
가령 사과 하나에 다른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이미 머릿속에 있는 선험적 개념을 기반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경험 없이도 오직 논리적 사고만 가지고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앎'은, 우리의 '앎'에서 극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베레스트산 꼭대기'에 직접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삼각법'을 통해 산의 높이를 알 수 있다. 단순히 그림자의 길이와 각도만 알면 말이다.
우주로 가보지 않아도, 지구에서 보이는 태양의 각도와 지구 크기를 이용하면 태양까지 얼마나 먼지도 알 수 있다. 그는 기하학으로 태양 및 달의 크기와 지구와 달의 거리,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계산했다.
기원전 310년 경이다. 인간이 실제로 달까지 가 본 것은 그뒤로 2270년이나 지나고 난 뒤에 일이다. 경험적 지식만으로 '앎'을 정의했다면, 아직도 달까지 거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여기서 200미터 앞에 있는 건물의 높이를 계산해 낼 수 있다. 우리는 '추상적 사고'로 우리는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 반대로 기압이나 바람, 온도라는 재료를 이용하여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다. 우리는 '추상적 사고로 '시간'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이 여타동물과 다른 것은 '추상적인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데 오롯하게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사고법보다 '추상적 사고법'이 시간, 비용, 노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가 증명한다.
이런 '사고법'은 의외로 모두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고, 후천적으로 발달 시킬 수 있다. 그 방법은 바로 '훈련'이다.
인간이 이런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학문이 '수학'이다.
'더하기, 빼기만 알아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토끼나 다람쥐, 돼지, 소, 말, 개도 살아가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직접 줄자를 들고 높이를 측정하는 것은 그닥 현명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추상적 사고' 위에 놓여져 있다.
약속 장소에 도달하는데 지금 속도로 얼마나 걸릴지를 계산하거나, 이런 씀씀이로는 앞으로 몇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본능적인 위기도 모두 그렇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용'을 기반으로 세워져 있다. 고로 '경험적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지적으로 알게된 사실'이다.
그것이 수학을 해야 하는 이유다.
둘째, '독서'는 왜 필요한가.
경험을 초월한 추상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는 '둑어'다.
수학이 숫자와 논리를 통해 추상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듯, 언어는 개념과 의미를 다루는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전쟁, 자유, 사랑, 희생, 평화'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직접 가보지 않고도 이야기 속의 세계를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다. 한 단어로 복잡한 감정과 상황을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다.
즉, 국어는 단순한 대화의 도구가 아니라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고 사고하는데 필수적인 도구다.
수학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고 국어는 경험을 초월한다. 직접 격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언어가 없으면 경험 밖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고,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능력이 바로 국어다. 수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논리적으로 계산하는 힘을 길러준다. 국어는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파악하고 비판하는 힘을 길러준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보이지 않는 개념인 '신용, 계약, 법, 약속, 브랜드 가치'등을 기반으로 굴러간다. 고로 정보를 해석하고 이해하며 타인을 설득하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된다.
여기에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외국어다.
영어는 정보의 80%을 열어준다. 지구에는 대략 80억명이 살고 이중 20억은 영어를 사용한다. 인터넷에 있는 정보의 80% 이상은 영어로 작성된다. 언어기반 모델인 AI는 기존 언어를 합성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다. 고로 '영어'의 확장은 더욱 가속화 된다.
최신 과학 논문이나 연구 자료, 최신 기술, 뉴스, 프로그램, 문화는 영어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또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언어의 확장이다. 언어가 확장되면 생각은 더 확장된다.
우리말에는 '정'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영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반대로 영어에는 'Privacy'라는 말이 있다. 이또한 한국어에서 뉘양스가 다르다. 다시 한국어에서는 '눈치'라는 단어가 있고 영어에는 알맞은 단어가 없다.
최근 영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니이브하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순진하다'라고 하면 되는데 왜 그런 표현을 쓰는가, 아마 그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이처럼 언어과 확장되면 사고하는 또다른 무기가 장착되는 것이다.
애초에 '한국어'는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시장이 한정적이다. 오죽하면 국가 전략 자체가 '수출주도성장'일 수 밖에 없을까. 여기에 추가로 한자가 필요하다. 한자는 한국어의 70%를 구성하고 있다. 또한 이 문자는 개념을 조립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한자는 '여러 부품'을 가지고 새로운 개념을 조립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 마치 '레고 블럭'처럼 말이다. 언어의 세계와 사고의 세계가 무한대로 확장되는 것이다.
고로 우리 교육에서 '국영수'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을 길러내는데 필요한 과목들이다.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그만 둘 것이 아니라,
조금 공부하면 조금 도움되고, 많이 공부하면 많이 도움되는 그러한 성질이다. '대학'을 가는데 사용하기에 국영수는 너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