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가와 요시히로'의 '연결되었지만 외로운 사람들'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스스로 생각하면 아웃풋이 평범하다'
대부분 자신의 생각이 독창적이고 유닉하다고 여길 수 있다. 다만 '범인'의 사고는 평범하다.
밥상 위에서, '스르륵'하고 움직이는 국그릇을 보며, '나에게도 염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 그 능력은 있었던가. 소설에서 보던 기적 같은 일이 자꾸만 나에게 일어나는가. 사람은 삶을 살수록 그런 일이 적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극히 드물게 천재성을 가지고 날 수 있다. 다만 삶을 '확률'에 기대고 살기에 인생은 너무 길고 위험하다. 누군가 조력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몇가지 실험이 있다. '애쉬의 동조 실험'이 그중 하나다. 참가자들에게 '선 길이'를 비교하는 문제를 낸다. 너무 명확한 문제지만, 주변인들은 일부러 틀린 답을 낸다. 이 경우에 대부분의 참가자는 답이 틀린 걸 알면서 다수의 의견을 따라갔다. 우리는 논리보다 사회적 압력에 더쉽게 휘둘린다.
그렇다.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는 정답에 우리는 '노'라고 대답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물리적 거리'가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 것은 아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대화가, 옆자리에 아무개보다 영향력이 클 수 있다.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정신적 거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공자'를 읽고, 누군가는 '워렌버핏'을 일으며, 누군가는 '스티브잡스'를 읽는다. 사람들은 각자 어떤 대화를 가슴속에 갖고 살아간다. 고로 같은 상황에 너무나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떠올렸다. 다만 붓다는 열매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상의 진리'를 깨달았다. 어째서 붓다가 만유인력을 떠올리지 않았고, 뉴턴이 '무상의 진리'를 깨닫지 않았는가. 그것은 그들의 가슴속에 각자 다른 것을 품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라고 하는 것이 번뜩하고 무에서 유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가슴속에 쌓아 두고 있던 무의식의 발현이다. '자기일 아닌 고민'을 동조해주는 타인과는 자신의 일이라 여기고 깊은 고민을 했던 철학자의 위치는 분명 다르다.
역사상 '어떤 일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본 이들에게 고민을 '아웃소싱'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들은 우리의 무의식에 숨어있다. 그들에게 우리의 걱정과 고민을 '아웃소싱'하고우리는 정작 해야 할 것들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무의식은 어떻게 결정 짓는가. 물리적 거리에 가까운 이들이 아니라 이미 수천 킬로 떨어진, 혹은 수백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선인들의 영혼을 가슴속으로 빌려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