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이 만들어도 이것보다 잘 만들겠다.'
국사책을 보며 솔직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유럽의 멋진 건축양식이나 유물들을 보면서 부러워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 일 것이다. 전혀 화려하지 않은 역사와 어딘가 닮은 소박한 유물들이 나의 나라의 역사라는 사실에 어디서부터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던 적도 있다. 이 책은 꾸준히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Simple is the best'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마치 전쟁 이서 패전하고 돌아온 병사가 변명을 늘어놓듯, 비겁하고 구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책을 조금 넘겨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저자인 최경원 작가님의 말이 옳다. 화려함이 반드시 문명 수준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스티브 잡스는 심플함이 최고의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CD롬을 포함하여 불필요해 보이는 기능과 디자인들을 과감하게 없애버렸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핸드폰의 물리 키보드도 과감하게 없애버렸다. 추가하는 것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라면 우리는 지금 컴퓨터 역사상 최고 비문 명사회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플함은 가장 실용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언젠가 외국에서 외국인 친구와 고기뷔페를 갔던 적이 있다. 음식과 함께 나오는 '가위'를 보며 친구는 말했다. '한국인스러운 발상이다' 나쁘지 않은 의미로 한 말이었다. 굳이 어렵게 잘 잘리지 않는 '나이프'라는 도구로 고기를 썰어 먹을 필요가 있나 하는 단순한 고민을 그들은 해보지 못하고 문화의 틀 안에 갇혀 목적을 상실했다. 고기가 잘 썰리면 그만이다. 한국인은 실용적이다. 그것을 우리가 이제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쌈채소와 함께 쟁반 위에 놓인 '천 쪼가리나 자르던 가위'를 보던 외국인 친구의 말처럼 우리는 '실용'적인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왜 그래야 돼?"를 생각하는 민족이다. 내가 민족이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게 표현해 보겠다. 우리는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의심을 항상 하고 살아간다. '채소와 밥을 따로 먹을 거라면 섞어 먹고 말지'의 비빔밥처럼, '어차피 자를 거면 잘 잘리는 것이 좋지'의 냉면 가위처럼, '어차피 마실 커피라면 편하게 먹으면 되지'의 믹스커피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는 없어도 되는 것들에 대해 과감하게 없애길 바라고, 있어야 할 것들에 과감하게 남기를 바란다. 불필요한 기술에 1000년의 기술을 보존한다는 샘 치고 수작업으로 나무를 깎는 장인들이 넘쳐 흐르는 '일본'에 비해 우리는 '보존'을 우습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나무를 깎는다면 기계로 깎아도 되잖아'의 사고를 갖고 있다.
그런 생각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이 된다. 거주 창스러움은 그것에 오랫동안 머물도록 한다. 하지만 단순함이란 언제든지 다음을 받아들일 비워둠이 된다. '여백의 미'는 채우지 못함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열린 결말'이란 마무리 짓지 못한 무능함이 아니다. 사용자에게 스스로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다. 주먹도끼는 이런 모양일 수도 있고 저런 모양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만 사용하라고 지정해 둔 듯, 세세한 디테일의 사용법은 사고와 상상력을 절제시킨다. 모든 것은 사용자의 몫이다. 창의적인 방식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사용자에 대한 배려와 존경이다. 우리가 긴 막대기에 '지팡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막대기는 역할을 제한받는다. 누구도 그 막대기를 지팡이 이외의 역할로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막대기에 역할을 지정하지 않는다면 막대기는 회초리가 되기도 하고 지팡이가 되기도 하며, 운동기구가 되기도 한다.
우리 유물들에 일관적인 특징은 단순함이다. 최대한 심플하게 만든다. 이것을 보고 처음 드는 생각은 모두 비슷할 것이다. 내가 제일 먼저 말했던 것처럼 '뭐야? 초등학생이 만들어도 이것보다 낫겠다.'이다. 이런 생각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특히나 고차원적인 사고를 요한다는 현대 미술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그렇다면 스티브 잡스의 디자인 미학이나 현대 미술 역시 차원을 역행하고 있는 발상들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 실용적인 유물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충분히 했으며, 다음의 미래를 받아들일 만큼 비워 두었고 사용자에게 창의적인 상상력을 열어두었다.
가야의 갑옷은 멋있는 서양의 값 옷에 비해 구멍이 숭숭 나있고 이음세가 깔끔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모듈'이라고 불리는 구조를 이용한 것이다. 통 철판으로 만들어진 서양의 갑옷은 손상이 되면, 통째로 버려야 하는 수고로움이 생기고, 무겁다. 움직임도 둔하게 된다. 작용도 어렵고 벗기도 힘들어 전쟁을 나갈 때, 항상 하인이 대동해야 했다. 하지만 모듈 구조는 단순한 기본 단위를 여러 개 엮어 확장시킨다. 그런 이유로 손상된 부분만 교환할 수도 있고 움직임도 편하다. 또한 탈착용이 쉽다. 제작단가도 저렴하다. '보기에 조금 멋스럽지 않으면 어떤가? 군복이 전쟁 수용에 용이하기나 하면 되지.' 우리스러운 결단들이다.
우리 유물들은 대게 대량 생산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대량 생산하기 위해 디테일을 포기하는 것은 경제적인 결정이다. 불필요한 무늬를 만들어 넣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넣는 일은 전혀 경제적이지 않다. 실용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랬다. 화살촉과 같은 무기가 그렇다. 빠르게 더 많은 무기를 생산해 내는 것은 국가의 안보에 중요한 일이다. 이 것에 무늬를 새기는 것이 국가 안보에 뭐가 더 중요한가.
하나의 역할을 하나로만 규정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결국 하나를 여러 개로 쪼개도 결국 하나로 돌아가려고 애를 쓴다. 주먹도끼는 그런 도구였다. 그냥 날카로운 돌멩이가 무슨 철학이 있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그 돌멩이를 물건을 찍기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없애는 일이 된다. 그럼 굳이 그 돌멩이로 가능한 업무를 다른 도구를 만들기 위한 불필요한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도구가 세부적으로 구분되어질수록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수프를 담는 접시와 샐러드를 담는 접시를 구분하고 고기를 올리는 접시를 모두 구분해야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건 비효율일 뿐이다.
그 누구도 스마트폰의 기능을 MP3와 카메라, 전화 등으로 나눠 쓰길 바라지 않는다. 하나의 아이템을 여러 개로 활용하는 것은 언제나 효율적인 방식이다. 종이는 접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으며 읽을 수도 있다. 태울 수도 있고 찢을 수도 있으며 돌돌 말 수도 있다. 이런 종이에서 '읽을 기능'만 떼어내는 '전자책'은 결코 종이를 이길 수 없다. 설령 정말 기술이 좋아져서, 접을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며, 태울 수 있고, 찢을 수도 돌 돌말 수도 있는 전자책을 개발하는 날이 온다면, 과연 그 아이템은 종이와 뭐가 다른가? 무엇을 위해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가?
우리 선조들은 이미 먼 과거부터 알고 있었다. '명상'은 채워져 있는 생각을 차분하게 비워 두는 일이다. 복잡한 일을 내려놓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알록달록한 여러 민족의 민족의상에 한참 미천해 보이는 '백의민족'이라는 꼬리표는 '미개함'이 아니라 '여백의 미'였다. '어른인 척'하는 이들은 '어른'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기 위해 열을 올리지만, 진짜 어른은 다시 '아이'가 되길 바란다. 최대한 화려해지고 싶은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능력을 끄집어내지만, 이미 달성한 이들은 굳이 그러지 않는다. 최대한 비우려고 노력한다.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순간에 하는 한 마디의 묵직함이 중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진짜 부자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 아낌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매한다. 진짜들은 자신의 가치를 주목받기 위해 발악하지 않는다. 수수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일수록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 알아달라고 발버둥 칠수록 자신의 바닥을 다 보여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한 류 이 미학은 결국 우리 유물의 철학이 그렇다는 것을 알려준다. 모든 국가가 자신의 역사와 민족을 자랑한다. 저 멀리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소수민족들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이고 하늘의 자손들이라고 믿는다. 옆 나라 일본만 보더라도 태양의 자손이라 믿고, 그 반대편의 중국에서만 보더라도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다. 다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평하 절하한다.
적당한 겸손은 스스로의 가치를 올려주지만, 지나친 겸손은 자기 비하이고 자존감 결여이다. 우리는 비극적인 근대와 현대사에 의해 우리 스스로 민족과 역사에 자존감이 많이 결여되어있다. 이 책은 두꺼운 책의 두께에 비해 내용이 쉽다. 편하게 볼 수 있도록 그림과 사진도 많다. 술술 읽힌다. 440쪽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하루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어떤 국가와 사회의 소속원인지는 개인의 자존감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흔히 말하는 국뽕(?)이라는 단어가 사용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저 구석에서 기도 못 피는 자존감 결여보다 조금 재수 없더라도 어깨를 피고 다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