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소설이다. 전반적으로 뚜렷한 사건도 없다. 그저 열대 농장의 집 안팍을 묘사할 뿐이다. 식사하고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간다. 그 모습을 묘소할 뿐이다. 그냥 그렇다. 그럼에도 푹 빠져 읽었다. 근대 미국 남부에 시간 여행을 온 느낌이다. 소설은 사건보다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의자의 각도, 창살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움직임, 술잔의 흔적, 죽은 지네의 흔적들...
사소한 모든 것들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모든 것이 기록된다. 흥미진진한 전개는 없다. 그저 아주 집요하게 장면 묘사만 한다. 마치 한폭의 풍경화를 감상하는 느낌이다. '한폭' 그리고 '한폭'. 그리고 '한폭' 언어는 화가의 붓질처럼 세심하게 장면 정면을 묘사한다. 아주 사소한 모든 것들을 묘사하며 점차 전체가 완성된다.
과거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무슨 내용인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노인이 낚시하는 내용이다. '노인이 낚시하는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느냐', 그 추가적인 질문에 언어화 할 수 없는 대답을 '빈공간'으로 놔두었다.
그렇다. 모나리자를 보면 그냥 여인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그걸 왜 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그림의 '서사' 때문에 바라본다고 대답하는 이들은 없다. 마찬가지로 '노인과 바다'는 노인이 낚시하는 내용이다. '신곡'은 그냥 지옥을 구경하는 내용이고 '노르웨이의 숲'은 더욱이 뭐 정확히 내용을 집어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어떤 서사보다 강렬하게 내 기억속에 남아 있다. 어떤 소설은 그저 줄거리를 따라 흘러가는 반면 어떤 소설은 아예 극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고전이 주는 특징이라면 그렇다.
'질투'에는 서사를 따라 가야하는 그런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편집증 걸린 환자처럼 모든 사물과 상황을 집요하게 바라 볼 뿐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감정과 서사를 간접적으로 느낀다.
인간은 '꼭 직접적으로 말해야 알게 되는 존재'는 분명 아니다. 흔히 '동양'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로, '눈치'라는 것이 있다. 주변을 둘러싸는 '분위기'와 '공기의 흐름' 그것은 언어화하기 매우 힘든 영역이다.
그러나 분위기상, 공기의 흐름상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대부분 실존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맞아 떨어진다.
'질투'라는 제목은 단순히 감정의 이름이 아니다. 이는 '해석 방식'을 닮았다. '질투'를 굳이 분류해 보자면 '추상명사'에 가깝다. 추상명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고로 '질투'가 정확히 무엇이냐,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다. 그것은 모두가 개인적인 경험으로 얻게 되는 '모호한 감정'이다.
사랑, 신뢰, 질투 이런 것들은 모두 그런 형태를 띈다. 이런 '관념을 담은 명사'를 언표하면 '질투한다'고 표현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과거 경험과 독자의 과거 경험이 정확하게 일치할리가 만무하다. 고로 작가는 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가 경험하도록 둔다.
질투라는 감정은 굉장히 모호하다. 이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 감정만 남은 상태다. 어떠한 의심 그러나 그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러나 미묘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이다. 사건은 없지만 감정만 남은 그 명사와 닮은 소설이다.
우리는 서사의 부재가 곧 결핍이라고 믿는다. '소설 괜찮네'라는 반응에, '무슨 내용인데?'하고 묻는다. 무슨 내용인지 말하면 '별로 안땡기네' 하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간접 경험을 놓치고 있는가.
독자는 서사의 부재 속에서 감정이라는 무형의 플롯을 얻게 된다. '질투'는 플롯의 빈자리를 감정으로 채워 넣는다. 결국 이 소설은 독자 스스로의 '과거 경험'을 통해서 완성된다.